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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극수의 역사이야기-2> 웅상은 살기 좋은 고장이다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2.05.22 14:11 수정 2022.05.22 14:11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박극수

ⓒ 웅상뉴스(웅상신문)
웅상은 울산에 속해 있을 당시에도 울산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고, 양산에서도 가장 끝자락이다. 양산시청에 가려고 하면 부산시를 경유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고 웅상과 맞붙어 있는 같은 양산 하북면, 상북면을 걸어가지 않고 차량을 이용하려면 웅촌면, 삼동면, 삼남읍 울주군 3개읍면을 지나야만 갈 수가 있다.

웅상은 몇 천년 동안 울산에 속해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 국권이 완전 상실되고 일정치하에 의하여 1906년 양산과 병합하게 되었다

웅상은 양산과 행정구역이 통합되기 이전까지는 역사성 전통성 생활권 학연 지연이 무관한 지역이었다. 얼마나 무관한 지역이었나 하면 이동 수단이 도보뿐인 시대에도 천성산이 가로 막혀 교류가 거의 없었고 부족 국가 때 영역을 넓히기 위한 전쟁을 해도 울산, 동래 쪽 부족국가와 전쟁을 했다. 양산 쪽 국가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도 구전도 없다.

임진왜란 시 출병한 웅상 의병들은 울산, 경주, 대구, 언양, 기장, 동래지방의 전투에 참여 했다는 기록은 생생하게 있지만 양산지역 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이런 무관한 지역과 행정구역이 병합된 요인은 일본인들의 저의에 의한 것이었다.

웅상에는 임진왜란 당시 서면(웅촌,웅상)에 거주한 주민이 약 3천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자진 의병에 출병한 웅상 병력이 800여명이었다. 전체 인구 3천명 중 절반은 여자고, 연세 많은 노인들,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젊은 남자들은 전원 의병이 되었던 지역이다. 의병에 출병한 병사들은 우시산국(부족국가)때 건립했다는 우불산성에 주둔해 밀려오는 왜구들과 얼마나 치열한 전쟁을 하였는지 우불산성 동편 방향 북부마을, 현 대동 이미지 아파트가 건립된 위치에 왜구들의 시체가 큰 등을 이루어 그 때부터 지명이 왜시등이 되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 우불산성 옛 성곽
ⓒ 웅상뉴스(웅상신문)
우불산은 작은 동산이지만 백두대간에서 내려와 천성산의 지맥으로 과일나무에 비유하면 가장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라 하며 영남에서도 풍수지리설이 가장 좋은 곳이라 한다. 주변의 큰 산들이 우불산을 향해 읍을 하는 형국이라 한다. 배읍봉 지명도 그래서 지어진 지명이다. 정족산, 대운산, 대추남만디, 용천산(솟슴산)도 그런 형국이다.

신라 초기부터 조선 말까지 단을 설치하고 국태민안을 위한 제사를 해마다 춘추로 모시고 국가와 지역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우불산신을 향해 제사를 모셨다. 제사를 모실 때마다 조정에서는 왕의 친필의 제문과 왕이 내린 향촉으로 제주는 울산 지방의 수령이 제주가 되고 울산 지방 유림에서 협력하여 모셔왔다.

더욱 일본인들을 불안하게 한 것은 우불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고 살고 있는 웅상 사람들 중에는 일본을 전복시킬 큰 인물이 배출된다는 설이 전해옴으로 일본인들은 큰 상처를 받았고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을 우려해 웅상의 정체성을 말살하고저 행정구역을 울산에서 양산으로 강제 병합시키고 우불산의 풍수지리설을 훼손하고저 맥을 끊기 위해 광산 개발을 하도록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제증명발급이나 인허가 관계상 양산에 왕래할 수 밖에 없는 문제 이외는 계속 울산과 부산과 연결되었다. 우불산신사 보존 관리도 1970년 경까지 울산 유림과 협력하였으며 상급학교 진학도 학군제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울산 부산으로 진학했다.
제래 5일 시장을 이용해도 울산장, 남창장, 언양장, 좌천장, 오시게장을 이용했지 양산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양산 병합으로 인해 가장 안타까운 일은 웅상의 역사기록과 유물관리가 홀대를 받아야했다. 울산에서는 웅상은 울산이 아니라고 기존 기록물과 유물이 소홀하게 관리되고 양산은 기록물이 전혀 없기에 관리 할 수가 없었다. 웅상은 100여년이 넘는 기간 역사의 상실 기간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웅상 주민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해방 이후 웅상 주민들이 협력하여 이룬 업적을 더듬어 보면 해방 즉시 혼란기에 주민의 힘으로 서창초등학교를 설립했다. 6‧25 전쟁 통에 정부의 아무런 지원 없이 사립 개운중학교를 설립했다.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기 이전 주민들이 재건중학교를 설립하여 가정사정이 어려워 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수업료 전액 무료와 교직원 전액 무임금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울산 시민 식수 공급을 위한 회야댐 건립으로 웅산, 웅촌 전역이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고 수원보호구역 지정계획 확정공고 절차를 진행할 시 이를 해지 하기 위하여 전 주민이 하나가 되고 앞장 선 분들은 구금까지 되는 일을 불사하며 엄청난 경비를 소요하고 정‧관계에 힘이란 힘을 다 빌리고 중앙 정부 관사를 내 집처럼 드나들며 5년이란 세월을 몰입하여 대한민국 제1호로 해지 통보를 받았다.
재래시장 서창시장 부지 대다수를 주민들이 기부하고 덕계시장부지 전체를 김수경 선생님이 기증하여 덕계시장을 개장했다. 서창시장 부지를 기증받은 상당 면적이 양산군청의 직무유기로 다시 매입하는 실수를 범했고 덕계시장 부지는 양산시에서 수의계약으로 매도를 했다.

ⓒ 웅상뉴스(웅상신문)
웅상에는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해야 할 공유부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으로 특히 덕계지역은
더 많은 공유지가 필요한 지역이다. 시민이 기증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짖밟고 토지를 매각하여 시 재정으로 사용했다 함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웅상출장소 부지와 문화체육센터 부지를 시민의 기증에 의하여 조성되었고 명동공원 절반이 울산 박씨 소유 토지를 무상으로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회야 하수종말처리장 증설도 주민들의 극성 어린 건의로 이루어 내었다.

우불신사와 우불산성, 삼호리 고분군, 웅상농청장원놀이가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받는 과정에도 관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관은 회피하고저 한 사안을 주민들의 극성과 인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고 우불산성 복원 건의를 수없이 많이 해 왔는데 무시당하고 지금에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비를 확보하여 발굴을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웅상지역에 조성된 도시계획도로와 소공원 조성은 60%이상을 주민들의 전적 부담으로 조성하여 양산시에 기부 채납 하였다. 소방서유치, 경찰서유치, 보건소유치, 회야강정비사업, 광역전철 계획도 확정단계이다. 주민들의 극성에 응해 주신 분들의 덕분이다. 이 외도 너무 많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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