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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앙 장영주
국악원 상임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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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마음의 알맹이’란 뜻이 아닐까?
대개 입 밖으로 나오는 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개개인의 마음이 다 다르니 자연히 나오는 말도 사뭇 다르다. 그것이 곧 인격이 되고 모아져서 국격이 되고 나아가 세상의 현실이 된다. 말씀은 ‘마음의 알’을 쓰는 것이다.
마음을 착하게 쓰면 착한 말씀으로 나오고 어둡게 쓰면 어두운 말씀이 된다. 말씀은 현실을 불러오니 가장 큰 쓰임새로 “일체유심조”이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쓰시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기록 되었다. 그만큼 빈틈없고 엄중한 것이 말이고 말씀이다.
탈무드는 “말을 깃털처럼 가벼워 주워 담기 힘들다”하고 모로코 속담은 “말로 입힌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깊다”며 경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은 곧 행위다’라고 했고 우리속담에는 ‘화는 입에서 나오고 병은 입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청구영언’(김천택 지음)에는 작지미상의 가사가 실려 있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하는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작자미상의 시조가사가 선택을 받아 보존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적인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다.
경북 예천의 한 마을에는 “말무덤”이 있다. 용감한 장군을 따르던 충직한 말(馬)의 무덤이 아닌 입에서 나오는 말(言)의 무덤이다. 비석도 세워져 있으니 앞은 한글로 ‘말무덤’ 뒤는 ‘언총(言塚)’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마을에는 김씨, 박씨, 류씨, 최씨, 채씨 등 많은 성씨들이 거주하니 문중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사소한 말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잦자 마을 어른들은 그 원인과 처방을 찾기에 골몰했다.
드디어 어른들은 의견을 모아 큰 구덩이를 파놓고 마을사람 모두에게 사발을 하나씩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 뒤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비방과 욕을 각자의 사발에 모두 뱉어놓으라”고 했다. 싸움의 발단이 된 말(言)들을 사발에 담아 깊이 파묻었다. 듣도 보도 못한 소위 ‘말무덤(언총)’을 세운 것이다. 이 처방이후 싸움이 없어지고 지금까지 두터운 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어른들의 지혜가 듬뿍 실린 슬기로운 처방이 아닐 수 없다.
‘말 많은 집안은 장맛도 쓰다’고 하고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고 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때론 비수처럼 상대를 찌르는 무자비한 폭력이 되고 끝내는 자신에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나라 정치인들의 말은 덕이 사라지고 날로 독해지고 있는가? 요즘처럼 오불관언, 내로남불의 망언과 폭언과 욕이 판을 치는 시절도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정치인들의 오염된 언어는 국민과 나라를 몽땅 태워 버리려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든다.
대선을 앞두니 날로 더욱 극악해져 상처를 내고도 헤짚고 소금까지 뿌리고 있다. 코로나는 더 기승이고, 불경기와 늘어나는 세금과 나라 빚으로 설상가상 국민들의 굽은 어깨 위에 던져진다. 정치인들의 썩은 말은 전국토를 횡행하며 더럽히니 분노하다가 지쳐 시름만 깊어진다. 가히 개싸움 판 이전투구요, 사람도 말도 지쳐버린 인곤마핍이니 모두 오늘날의 우리모습이다.
대학교수들은 올해의 사자성어에 ‘묘서동처(猫鼠同處)’를 선정했다. “곡식을 훔치는 쥐와 쥐 잡는 고양이가 한통속이 돼 이권에 개입하거나 연루된 상황을 수시로 봤다”는 것이 선정이유이다.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이 다가 온다. 가까운 사이 일수록 상처되는 말이 오가기 쉬우니 말무덤을 교훈 삼을 일이다. 2022년은 큰 선거가 있으니 그만큼 모두 정직하고 생산적이며 평화로운 말만 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국민과 나라와 세계가 모두 ‘만사형통’으로 ‘태평성대’를 말씀으로 만들어 내기를 강력하게 소망한다. 우선 여의도 국회 앞에 커다란 ‘말무덤’을 세울 일이다. 그런데 과연 여야가 합의할까?
결국 모든 국민들이 우선 각자 마음 안에 급히 말무덤 하나씩 만들어야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