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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영주 칼럼

한반도의 겨울 폭풍 1636.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1.12.09 09:24 수정 2021.12.11 09:24

원암 장 영 주
사)국학원 상임고문
웅상신문 칼럼위원

ⓒ 웅상뉴스(웅상신문)
어김없이 겨울은 오고 한반도는 매서운 한파가 시작되고 있다. 서기 1636년 12월은 역사상 가장 추웠던 겨울로 기록 될 것이다. 압록강이 얼자마자 청나라가 침입하여 난리가 터지니 병자호란이다. 한줌의 남한산성에 갇혀 저항하던 조선의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은 마침내 송파 삼전도에 끓어 앉아 항복을 하였다. 근세조선의 518년 역사상 초유의 비극이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에 비해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초부터 다음해 1월 말까지 단 두 달 만에 전광석화처럼 벌어지고 끝났다. 과감하고 치밀한 청 태종 ‘홍타이지’(1592~1643)는 명나라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먼저 후환을 없애려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란(戰亂)’의 ‘전’은 외국과의 전쟁이고 ‘란’은 동족간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은 6.25동란과 같은 동족간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 그림. 원암 장영주
ⓒ 웅상뉴스(웅상신문)
1636년 봄, ‘후금’을 세운 여진족 수장 ‘누르하치’의 아들 청 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조선은 이들을 변방의 오랑캐로 치부하던 만큼 황제로 인정 할 수가 없었다. ‘서애 유성룡’도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조선에 의탁해 살아온 자식”이라고 적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395년과 1404년, 여진족의 추장 ‘퉁밍거 티무르(童猛哥帖木兒)’가 태조 이성계와 태종에게 조공을 바치러 한양을 다녀간다. 조선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하여 ‘오도리 상만호上萬戶’라는 직책을 주었다. ‘퉁밍거 티무르’는 바로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 태종의 직계 조상이다. 일개 여진족장에서 바야흐로 대제국의 주인이 되려는 청 태종은 명나라를 국진하게 사대하는 조선을 늘 ‘후방의 적’으로 여겼다. 1627년, 온갖 트집 끝에 정묘호란을 일으켜 형제 국으로서 조약을 맺고 ‘형이 되어 너그럽게’ 물러갔다. 그러나 언필칭 ‘너그러운 형’인 청 태종은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고치라고 조선을 겁박한다. 세폐도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 3만 명까지 늘릴 것을 요구한다. 국력도 부족하거니와 필히 명과 전쟁을 하기 위한 군수물자들이므로 조선은 들어 줄 수가 없었고 결국 병자호란을 당한 것이다.

유난히 추웠던 병자년 겨울,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은 척화파와 주화파의 목숨을 건 갈등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날도 냉혹하고 식량도 떨어지고 시도 때도 없이 산 아래에서 성안으로 쏘아대는 청군의 홍의포의 위력에 놀라 결국 항복문서가 오간다. 문서가 몇 번씩이고 오가며 알량한 체면 때문에 시간을 버리는 동안 성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속절없이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간다. 무수한 시신이 시구문으로 버려져 쌓이고 성 밖의 백성들은 청군의 사냥감이 되고 있었다. 청 태종은 궁지에 몰린 조선의 국왕 인조를 겁박하며 꾸짖는다. “정묘년의 치욕을 갚겠다면서 왜 성으로 숨느냐? 너희를 쳐서 명나라가 어찌 하나 보겠다. 이 조그만 성을 취하지 못한다면 짐이 장차 어떻게 중국 본토로 내려갈 수 있겠느냐? 네게(조선 국왕) 성을 나오기를 명하여 짐을 만나보게 하는 것은, 첫째는 네가 성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복종함을 보고자 함이요, 둘째는 네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나라를 다스리게 한 다음 군사를 돌이켜서 후일 짐의 인(仁)과 신(信)을 천하에 보이고자 함이다.”

강력하게 몰아치는 청 태종의 협박에 대한 인조의 떨리는 대답이 낮게 전해진다.
“명나라는 우리와는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항복하면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청나라)황제 폐하가 용서하셔도 조선 백성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비 오니 저의 피맺힌 정성을 보아서라도 살려 주십시오.” 하찮은 오랑캐라고 경멸하면서 교만했던 조선의 왕과 조정으로써는 더없이 애닯프고, 구차하고, 비천하다.

결국 인조는 1월 30일 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찧으며 ‘삼배구고두’의 항복의식을 거행한다. 조선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청군은 명나라 공격을 대비하여 급히 회군한다. 이로서 병자호란은 화급히 끝을 맺지만 ‘60만 명’의 조선백성은 포로가 되어 몽골과 청나라로 끌려간다. 단 한사람도 우리의 조상이 아닌 분이 없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의 가족인 여인들은 ‘환향녀(還鄕女)’는 곧 가여운 ‘화냥년’이 되어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만다.

광해군의 명, 청간의 절묘한 등거리 외교술이 인조반정으로 무산된다. 조선은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에 사로 잡혀 한사코 기울어 가는 ‘명’에 의지하다가 결국 뜨는 ‘청’의 노예로 전락한다. 개국 초기 조선은 여진족을 ‘아들과 신하’로 밑에 두다가 정묘 년엔 ‘형님’으로 모시더니 병자년엔 돌연 ‘신하’가 되어 생사여탈권을 빼앗겨 버린다. 불과 214년 만의 일이다. 개국초기의 엄청난 힘으로 넓혀간 국토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청’도 부패와 무능과 교만이 겹쳐 쇠퇴하더니 서구열강에 뜯겨 1910년에 멸망한다. 조선은 상국인 ‘청’의 압박으로 마지막까지 신음하다가 한일합방에 이르니 같은 해에 주인이 청에서 일본으로 바뀐다. 병자년으로부터 274년 뒤의 일이다.

결국 일본도 패전하고 그 틈에 어찌어찌 독립하여 ‘대한민국’을 세우나 불과 5년 뒤 6.25동란이 터지니 이 또한 세기의 참극이다. 중국 공산당은 북한을 도와 미국에 항거하여 우리를 침략하는 소위 ‘항미원조’(抗美援朝, Resist America and Assist Worker's Party of Korea)전쟁을 일으키니 우리는 세계유일의 분단국이 되었다. 이때 모택동은 서쪽의 티베트를 침공하여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온 국민의 ‘눈물과 땀과 피와 하느님의 보우하심’으로 가시밭을 헤치고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 된다. 교만해지면 곧바로 ‘참혹한 끝장’이다. 참혹함의 대물림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을까? 결국은 ‘부국강병’과 ‘인류평화’가 해답이다.
어떠한 대책을 어떻게 세워 부강한 나라와 평화로운 지구촌을 만들 것 인가?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세계에 이바지 할 것인가?
깊이 자각하고 전력으로 추구해야 한다.
서기 2022년, 단기 4355년, 임인 년! 바야흐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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