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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미정 |
ⓒ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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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힐 것 같던 무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고 나니 계절은 초가을이다. 몇 차례의 태풍이 휘몰고 지나간 후, 하늘은 드높아져 청명하고 살랑이는 바람에 가을향기마저 묻어온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요즘이다. 이렇게 바람 좋은 날 노마(老馬)를 몰아 그다지 멀지 않은 함안 나들이에 나선다. 함안은 우리 지역에서 차로 한 시간여 달리면 갈 수 있는 지역이다. 함안은 옛 지명이 고을 주(州)가 들어간 함주(咸州)이니 예로부터 살기가 좋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해 금관가야를 비롯한 여섯 가야중 하나였던 함안은 고대 아라가야 고도이다. 고도 함안은 소중한 문화재와 역사를 지닌 곳이 많다. 그리고 남강과 함안천을 끼고 있어 자연경관도 수려해 계절마다 테마를 가진 축제를 펼친다. 연꽃 테마공원에는 700여 년을 땅속에서 잠자던 연자가 깨어나 까마득한 세월을 거스른 그때 모습 그대로 피어난다.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아라홍연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은 7월의 더위도 개의치 않고 모여든다. 남강과 함안천이 합수하는 자리 바위 벼랑에는 악양루가 있다.
그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해 질 녘 풍경은 참으로 일품이다. 무진정, 무기 연당과 단풍에 흠씬 취할 수 있는 입곡군립공원 등 함안은 은근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언젠가 ‘아라가야 나들이’란 글에서 함안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어, 그때 이야기한 칠월의 ‘아라홍연`과 오월의 함안 둑방 꽃길’은 접어두고 오늘은 역사가 깃든 곳 나들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
- 고려동(高麗洞)유적지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의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려 벼슬을 버리고, 충절을 상징하는 목백일홍(배롱나무)이 핀 곳을 찾아 정착한 고려인이 있었다. 그가 모은(慕隱) 이오(李午)선생이다. 가족을 이끌고 정착한 곳이 고향 함안의 한 고을이었다. 그 땅에 담장을 쌓고 ‘고려동학’ 이란 비석을 세워 고려 유민들의 거주지임을 알렸다. 조선의 벼슬을 거부하고 고려 유신들이 은거했던 황해도 개풍군의 한 마을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는데, 고려동(高麗洞)은 곧 함안의 두문동(杜門洞)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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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미원 백일홍 |
ⓒ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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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을 길목에서 찾아 든 고려동은 필자가 세 번째 방문하는 길이다. 처음 고려동을 찾은 날은 자미원의 나이 많은 백일홍(자미꽃)이 막 꽃을 피워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남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산인 IC 부근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자리한 볕 바른 마을이 보인다. 고속도로를 오갈 데마다 마을이 따사로워 보인다며 한마디씩 하고 지나쳤는데 ‘고려동’을 찾고 보니 이곳이 그 마을이었다. 고려동 마을을 들어서 ‘고려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오래된 수령의 백일홍 나무를 만나게 된다. 자미원이다. 자미원 왼쪽으로 이오 선생의 후손이 사는 종택이 있다. 재령 이씨 종택이다. 종택은 항시 열려있어 누구나 쉽게 방문이 가능하다. 종택의 전각들을 보면 조선의 한옥에 비해 몸집이 작으면서도 오히려 단아한 느낌이다.
자미정의 기둥 주련에 행서체로 새겨진 글은 모은 이오 선생의 시이다. 앞마당 한쪽 한시를 한글로 풀어 놓은 안내판이 있다. 잃어버린 고려에 대해 애잔함과 애틋함이 담겼다. 그 앞에서 문득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던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시 ‘오백 년 도읍지’ 속의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구절이 떠올랐다. 이오 선생도 길재의 시 속의 인걸이 아니었을까. 고려동에서 망국의 한과 인생무상을 애달파 하며 여생을 보냈으리라.
- 백비(白碑) 선생은 자손들에게 ‘사후에 어쩔 수 없이 조선의 땅에 묻혀야 한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백성이 조선왕조의 땅에 묻히면서 무슨 말을 적어 묘비를 세우겠느냐. 묘비에 이름을 물론이거니와 글 한 자도 새기지 마라.’ 는 유언을 남겼다. 자손들이 선생의 말에 따라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비석을 세웠으니 그 비석이 바로 백비(白碑)이다. 작은 공적이라도 치레처럼 스스로 여기저기 새기기 좋아하는 요즈음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모은 이오 선생의 청렴결백과 충절은 지금 이 시대에 되새겨 보아야 할 정신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자미정에 걸린 모은 이오 선생의 시(詩) 두 수를 옮겨 적어본다.
밤마다 넓고 큰 바다에서 떠오르는 외로운 달을 맞이하며/ 해마다 작은 밭을 개간해 구기자를 길러보네/ …… 이른 봄이 해 저문 산가에 이르는데/ 슬픈 노래 읊조리며 서로 따르는 이 자리/ 서울로 가서 다시 벼슬아치 옷 입음을 부끄럽게 여기려네 <자미정 주련 해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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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숙 시인 |
ⓒ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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