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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유럽 인문학여행22] 라즈네 킨즈바르트에서 메테르니히 만나다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4.11.04 14:23 수정 2024.11.04 02:23

김서련 소설가


ⓒ 웅상뉴스(웅상신문)

“안정이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정치가인 메테르니히가 한 말이다. 까를로비 바리를 출발한 리무진은 점점 독일 국경 근처에 있는 라즈네 킨즈바르트로 향한다. 1773년 5월 15일 메테르니히가 태어난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이기영 대표는 ‘비인 회의’의 메테르니히의 집을 내부관람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메테르니히에 대해 설명한다.
메테르니히.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이었던 그는 비스마르크의 등장 이전에, 프랑스의 탈레랑과 함께 19세기 전반기 유럽의 국제 질서를 정립한 주인공이자 백 년 평화를 이룩하게 만든, 1815년 ‘비인 회의’의 주재한 인물이다. 비인 회의 이후 39개의 영방으로 정리된 독일 지역에 자유와 민족주의가 결합되면서 통일운동의 씨가 뿌려졌다고 한다.
메테르니히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엇갈린다. 복고적, 반자유주의적인 빈 체제를 구상해 낸 인물이지만 나폴레옹 시대 이후, 국가 간 '협력'과 '세력 균형'을 통해 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유럽 질서를 창출하여 외교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라는 것.

ⓒ 웅상뉴스(웅상신문)
아무튼 메테르니히의 집을 보고 메테르니히에 대해 알아본다.
오늘은 역사 공부….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을 관람할 때의 궁금증 하나가 해소된다.
나폴레옹의 아들이었던 나폴레옹 2세가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를 견제한 사람이 바로 메테르니히. 나폴레옹 시대를 종결짓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답게 그는 나폴레옹 2세가 나폴레옹의 아들이지만 자신들의 황제인 프란츠 2세의 외손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큰 제재를 가하지는 못했지만, 나폴레옹 아들이 철저히 독일식 교육을 받도록 했고 프랑스어를 배우거나 프랑스 책을 읽는 것을 엄금했다.

#메테르니히: 신성 로마 제국 트리어의 선제후국의 실질적인 수도 코블렌츠[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속한 메테르니히 가문은 몇몇 트리어 선제후를 배출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1795년,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오스트리아 재상이었던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의 손녀 엘레오노레와 결혼했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국가재상직을 역임한 인물은 카우니츠와 메테르니히 둘 뿐이었다. .
1806년, 나폴레옹 통치하의 주(駐)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한 후, 1809년부터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으로서 1810년의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 실현에 힘썼다. 그 후 1813년 이후 러시아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체제 타도에 공헌했다.

1814~15년의 빈 회의를 주재하고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를 열강 간의 세력 균형에 기초하여 재건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모든 개혁과 혁명이 안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죽어가는 구체제를 다시금 살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외교관으로서 그의 목표는 전시대의 정치유산인 국가 간 견제와 균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패전국인 프랑스에 대해서 그리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 결과만 보면 프랑스는 전범 취급은 당했지만 아주 큰 손해는 보지 않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명분 때문에 프랑스 자체를 쪼갤 수 없었고(빈 회의로 결정된 프랑스의 국경은 혁명 이전인 부르봉 왕조 대에 거의 확정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프랑스를 패전국이라고 아주 개박살을 내버리면 세력의 균형은 커녕 다른 국가들이 제2의 프랑스가 되어 또다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거나, 혹은 프랑스가 복수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훗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게 가혹했던 베르사유 조약이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아주 적절한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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