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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극수의 역사이야기

임진왜란에 대처한 웅상주민들의 수난사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4.11.04 11:27 수정 2024.11.04 11:27

박 극 수
시인. 양산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
웅상신문 칼럼위원

ⓒ 웅상뉴스(웅상신문)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중 가장 비극적인 수난은 임진왜란이다. 모든 백성들이 처절한 전쟁의 아픔을 당해야 했다. 침략군 왜병들에 의하여 부산진성, 다대포성, 동래성은 몇 시간 만에 함락되고 성안에서 사력을 다해 싸운 백성들은 모두 몰살당했다.
나라 임금과 대신들과 전국 대다수 우리나라 관군과 백성들은 질겁을 하고 피신을 한 상태라 왜병들은 파죽지세로 별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에서 출발하여 20여일 만에 한양까지 입성했다.

임란초기에는 웅상은 왜구들이 북진하는 진로 지역이 아니였기에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피해를 당한 지역은 아니였지만 전국에 왜병들이 배치 주둔하기 시작한 때부터 전병력중 영남 일원에 3분지 2 병력이 주둔하고 웅상 인접 지역에는 왜구들이 부산성, 기장성, 서생성, 도산성을 건립하여 많은 왜병들이 주둔한 지역이라 왜구들의 폭정에 시달려야 했고 아군들은 성을 빼앗기 위하여 많은 전쟁을 하게되어 치열한 전쟁의 최일선 되었다.

당시 회야강 상류까지 배가 왕래하여 강과 바다를 접하여 건립된 왜성에 주둔한 왜병들은 회야강변 마을들을 자기집 안방 드나드는 것처럼 래왕하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약탈 행위를 자행했다. 왜병들은 군량미 확보와 전쟁물자 확보, 성건립 인부동원, 전쟁물자 이동 과정에 인근 주민들에게 강제 수탈과 부역으로 소집하여 충당하였다.
회야강변에는 국가에 납부한 조세양곡을 거두어 보관 관리하는 창고가 서창과 남창에 있었다. 이로 인하여 지역명이 서창 남창이 되었다. 조세 양곡 보관 창고가 건립된 지역은 많은 양곡이 생산되어 부과된 조세량이 많은 지역으로 양곡을 운반할 교통수단이 좋은 곳을 택했다. 회야강변에는 넓은 들이 펼쳐저 있고 회야강에는 배가 왕래하여 조세 양곡 창고 위치로는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회야강변에는 많은 도예지와 철을 제련하고 가공한 점터가 여러곳에 있었고 많은 양의 종이를 생산한 곳도 여러곳에 있었다. 지역 특산품은 우리나라 조정에서도 공납품 대상이 되어 공납품으로 납부하기도 힘에 벅찬 지경이었는데 왜구들까지 중점 약탈대상이 되어 주민들은 공납과 약탈에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지역특산품 가공업체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은 왜병들의 최우선 납치 대상이 되었고 기술자들만 납치한 것이 아니라 노예 시장에 내다 팔 백성들까지 닥치고 보이는대로 총칼로 난도질을 하며 남녀노소 어린이까지 납치해 노예 상인들에게 넘겼다.

다른 지역보다 양곡 생산이 많은 지역이라 각종 공과금이 더 많이 부과되고 부자 몇 사람들이 농지를 다 차지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소작농으로 초근목피로 겨우 생명을 이어가며 먹을거리가 없어 굶기를 예사로 하는 판국에 부자들은 탐관 오리와 밀착이 되어 각종 부담를 감면과 면제 받고 지역에 배당 부과된 각종 부담을 부자들 몫까지 대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감당해 왔던 처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들은 식량도 가축도 생명도 문화유산도 맘대로 앗아가고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명나라 지원군도 우리 관군도 백성을 괴롭히기는 매한가지였다.

임진왜란시 웅상과 웅촌은 울산군 서면이었다. 임진왜란시 서면에서 벌어진 전투기록은 찾기가 어렵고 임란사에 관한 연구는 1990년 이후에 발표된 자료가 있긴 해도 1906년까지 웅상은 울산에 속해있다 양산으로 병합되었다. 연구한 자료가 웅상에 대한 연구가 너무 소홀하여 1세기를 지나면서 웅상은 역사적으로 유랑민이 되었다. 구전으로 전해오다 기록으로 남겨저 있는 웅상지역 임진왜란 전투는 우불산성과 왜시등의 전투다. 왜병들의 천인공노할 폭악무도한 짓거리에 분노를 이기지 못한 지역민들은 이래도 죽는 목숨 저래도 죽는 목숨이니 악이라도 한번 내어 보고 죽자는 일념으로 자진하여 의병으로 출병하였다. 당시 서면장으로 재임한 박홍춘이 의병장이 되어 우불산성에서 전투에 임한 의병은 400여명으로 전해온다. 평생 농사일 말고는 해본일이 없는 그들은 우불산성에서 군사훈련도 하고 지역경계에도 온힘을 다했다. 왜병들은 우불산성 의병들을 함락하기 위하여 우불산성 아래 회야강 넘어 왜시등(지금은 대동이미지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어 있음)에 구름떼처럼 몰려 진을 치고 있는 왜병들과 우리 의병들은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다.

의병장 박홍춘은 저 많은 왜병들을 우리 소수 의병이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남루한 차림을 한 도인이 나타나 차림은 허술하였지만 위풍이 너무 당당하여 의병장 박홍춘은 자신도 모르게 도인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니 도인은 걱정하지 말아라 하며 왜시등에 몰려있는 수많은 왜병들의 진지를 향해 바라보더니 필묵을 꺼내어 종이에 글을 써서 대운산을 향해 던지니 글쓴 종이가 대운산 상봉에 떨어졌다. 종이가 떨어지자 말자 대운산에 회오리 바람이 불어 낙엽이 하늘을 덮고 왜시등에 떨어졌다. 낙엽은 모두 군사가 되어 왜병들을 순식간에 전멸시키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다.

의병장 박홍춘은 도인의 은혜에 보답하고저 전쟁이 끝나면 상부에 보고하여 큰 상이라도 받도록 하여야 겠다는 생각에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 하니 소승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대운산 산신님과 우불산 산신님의 덕과 조화이니 산신님을 잘 모시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왜시등이란 지명은 왜병들의 시체가 큰 등을 이루어 지명이 되어 지금까지 왜시등으로 불러지고 있다.
한편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는 화승총을 쏘며 몰려오는 왜병들을 우리 의병들은 우불산성을 의지해 활을 쏘니 신풍이 불어 먼거리에서 쏘는 화살이 백발 백중하는 기적이 일어나 왜병들을 전멸하였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임진왜란시 웅상 출신 의병장들의 활동상황 연구대상은 울산 임란선무원종공신으로 추대되어 울산 충의사에 배향된 분들을 기록한다.
의병장으로 추대된 분들의 친인척과 출신마을 주민 중 의병자원 대상이 되는 분들은 대다수 의병으로 출전하였고 여성분들과 노약자 분들은 전쟁 뒷바라지에 전력을 다했다.

소개 순서는 회야강 상류 출신부터 소개하기로 한다.

달성서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매곡 서몽호
창원황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평산 황민중
울산박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명동(옛 지명 명곡) 박홍남
울산박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명동 장희춘 (어머니 울산박씨)
학성이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주남 이겸수
울산박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용당 박홍춘
울산박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용당 박경은
울산박씨와 친인척이 집성을 이루었던 용당 박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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