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등을 밀고 온 봄의 일기가 들쭉날쭉한다. 봄을 재촉하는 비인가 하면 비 그치고 난 다음 날이면 계절은 겨울 꼬리를 잡고 놓지 않는 듯하고, 다음 날이면 전날과 10도가 넘는 기온 차를 보이며 불쑥 봄날이다. 이러니 적응이 힘든 몸은 봄 감기로 힘들다. 기분 좋게 그낭 봄타는 중이라고 말하자. 들판에는 겨우내 땅의 기운을 받은 봄나물들이 여린 입술을 뾰족이 내밀며 미식가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겨울 대구가 물러가고 봄 도다리쑥국이 식탁 위로 봄을 몰고 자리를 차지한다.
연록이 익어가며 초록이 빛나기 시작하면 나이 든 가슴도 철없이 설레기 시작한다. 한 여행사에서 SNS로 보내온 광고에 꽃들이 화사하다. 그 사진들을 보며 봄 속으로 찾아가야 할 것 같은 설렘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버스 여행과 기차여행을 두고 저울질하는 기분이 상기된다. 봄 여행의 실행은 아직 미지수인데 괜스레 마음이 바빠진다.
ⓒ 웅상뉴스(웅상신문)
봄날의 꽃과 대지의 푸름을 떠올리며 다시 몽골여행기를 이어본다. 끝이 없는 지평선을 가진 몽골의 국토 면적은 얼마나 될까. 자그마치 대한민국의 15배에 이른다. 엄청난 면적에 사는 인구는 300만 정도이다. 종횡무진으로 초원을 다녀도 도시나 소도읍 혹은 여행지가 아니면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이런 초원의 한복판에서 몽골인도 아닌 한국인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는 일이다. 먼 곳의 사람이 겨우 점 하나로 보이는 초원에서 기적의 만남이 있었다. 청주공항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기상악화로 함께 염려하고 왔던 뒷좌석의 신혼부부를 초원에서 만난 것이다. ‘이럴 수도 있는 거냐?’며 반가움에 초원의 풀 향기 같은 웃음을 나누었다. 일주일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내일은 귀국한다는 부부와 서로의 연락처도 나누고 서로의 일정을 앞세워 초원에서 이별했다.
ⓒ 웅상뉴스(웅상신문)
그리고 아직 몽골에 머무를 일정이 남은 나는 일행과 함께하는 여행은 이어졌다. 몽골에 있는 투르크(돌궐) 유적지 여름 궁전을 찾고 난 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투르크의 겨울 궁전도 찾았다. 바다라치면 망망대해 한 자리에 있는 섬을 만나는 것 같다고 하면 말이 될까. 끝없이 이어지는 녹색의 평원에서 만난 겨울 궁전은 앞서 찾았던 여름 궁전과 같이 돌로 쌓아 올린 건물이다. 본래의 형태는 많이 잃어버렸지만, 여름 궁전에 비해 그나마 보존 상태가 나은 편이었다. 여름 궁전에서도 그랬듯이 석조 건축물을 지을 만큼의 많은 돌들이 어디서 왔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했다. 조적을 한 벽돌은 마치 최근 인테리어로 쓰고 있는 파벽 느낌이다. 출입구의 아치 형태의 문이 아름다움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 아래 흙바닥에 사각의 작은 돌을 두어 그 위에 손을 펼쳐 찍은 자국이 있는데 일행 중 한 여성 손을 펼치니 딱 맞다. 겨울 궁전의 완공 기념으로 새긴 듯했다. 몽골인들이 지었다면 몽골인의 몸집이 우리와 비교해 큰 편이어서 손이 이리 작을 리는 만무했다. 일행은 모두 갸우뚱거리다 내린 결론은 겨울 궁전 공사 담당자가 아마 여성이었던가 보다며 웃고 말았다. 한참 시간이 지났어도 손바닥 흔적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있다.
ⓒ 웅상뉴스(웅상신문)
겨울 궁전 가까이 게르 한 채가 있었다. 겨울 궁전 관리인이 그곳에 머문다고 한다. 겨우 그 형체를 가지고 있는 궁전이나마 더 이상의 소실을 막기 위해 관리자를 두었구나! 했다. 인기척을 느낀 관리자가 게르에서 나왔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다. 운전자(절러치) 체키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노인이 우리를 자신의 게르로 초대했다. 여느 가정의 게르보다 좀 더 낡아 보이는 게르다. 게르 안은 마치 우리의 시골 사랑방처럼 적당히 낡은 풍경이었다. 관리인 노인은 100세가 다 되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무너진 겨울 궁전 터에서 얼마의 세월을 보냈을까. 어쩌면 우리 일행이 이 계절에 처음 방문객은 아니었을까. ‘가뭄에 콩나듯’ 만나게 된 사람들이 반가워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 놓는다. 자신은 몽골의 혁명도 지켜보았고 사회주의 탈피도 보았다고 했다. 겨울 궁전의 관리인이란 자부심도 커 보였다. 일정이 있는 일행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노인의 100여 년 세월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가이드를 맡은 대학 총장님의 중개로 노인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노인은 몽골의 전통 가면을 쓰고 바라를 치며 부르는 주문 같은 노래를 다 마치고 난 후 관리인의 게르를 나왔다.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하리//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날이 밝았으니 불안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 류시화 詩 <여행자를 위한 서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