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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균 사기장 |
ⓒ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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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신의 그릇’. 신한균 사기장이 그 소설을 쓰게 된 것은 1994년 6월 17일 오전이었다. 그날 그는 일본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을 보러 갔다.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교또 코호앙 입구에는 주지 스님과 일본 도예 전문가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두 번째, 세 번째 상자도 열었다. 네 번째의 검은 칠기 상자가 보였다. 오른쪽 위에 금색 글자로 ‘고려’ 그 아래에는 ‘이도’라 씌어 있었다. 뚜껑을 열자 자줏빛 비단이 나타났다. 자줏빛을 덜어내자 사발 하나가 소박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신의 그릇’이었다. 바로 조선 사기장의 혼이었다. 도예가로서 신한균은 이 막사발의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도자기를 빚다가 소설을 처음 쓰면서 힘든 적은 없었는지.
조선 사기장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한국에서 그분들의 흔적은 깨어진 사금파리밖에 없었다. 그분들이 끌려간 일본으로 갔다. 십여 년 동안 그분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이삼평, 존해, 종전., 백파선, 심당길, 또칠이, 팔산… 등 그분들의 도자기 기술이 일본이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기로 했지만 도예가는 그릇으로 말하지 글로 말하지 않는다는 말에 펜을 놓았다.
하지만 그분들의 넋이 기어코 글을 쓰게 만들었다. 2006년 봄, 펜을 잡았고 뼈대를 완성했다. 그러다 2007년 5월, 글을 엎고 다시 쓰고 수십 번 교정했다. 그 와중에 그 와중에 아버지 신정희 사기장이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그는 중환자실 대기실에서도 글을 썼다.
그는 아버지 신정희 사기장의 장인정신을 소설 속에 넣으려고 애썼다. 2008년 3월, 드디어 글을 완성했다. 글에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파란만장한 삶뿐만 아니라 완벽한 단 하나의 그릇을 빚기 위한 사기장들의 분투와 절망, 열망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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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8쇄 찍은 '신의 그릇' |
ⓒ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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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다완’ 대신 적절한 제 이름을 찾아줘야 한다는 말은
이도다완 대부분은 임진왜란 전 영남지방 민가에서 제기로 쓰던 황도(일명 조선 막사발)였다. 제상에 메 올리는 멧사발과 반찬 올리는 보시기였다. 이것이 일본에서 이도다완으로 불리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다도에서 애용했던 환상의 도자기로 변모했다.
이도다완에는 조선 사기장의 혼이 깃들어 있다. ‘이도’는 일본인의 성이다. 조선 사기장의 예술혼으로 빚은 그릇에 일본인의 성이 아닌 제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좋은 사발과 도자기를 남겨서 이 세상에 이바지하고 양산법기리요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할 생각을 하고 있다. 왜 양산법기리요지가 유네스코에 들어가야 하느냐면 한국과 일본 최초의 공동 프로젝트이고 거기서 만든 도자기가 유럽까지 건너가고 일본 도자기의 새로운 역사를 연 것이 법기리요지다. 국가사적 100호인 양산법기리요지에서 일본이 국보처럼 여기는 차사발의 원형 사금파리가 나온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00여 년 훨씬 이전에 일본이 그림을 그려서 한국에 주문했다. 그것을 만든 전용 가마가 법기리요지다. 즉 한일공동프로젝트다. 일본은 자기들이 디자인을 했다고 해서 원류라고 한다. 법기리요지에서 만든 사금파리가 일본의 유명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그것을 다 찾아서 정리할 필요가 있고 미학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 논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것의 유럽에 갔다는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신한균 사기장은 현재 NPO 법기도자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사적 100호인 양산 법기 요지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노무라 그룹문화재단에서 초대를 받아 법기도자심포지엄과 전시회를 일본 교토에서 오는 가을에 개최할 예정이고 법기도자국제공모전도 일본과 함께 오는 가을에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