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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달콤쌉싸름한 나의 이야기>/ 고향 친구들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12.10.12 16:25 수정 2012.10.15 04:25

ⓒ 웅상뉴스
오래간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한동네에 살면서 참외서리도 하고 긴긴 겨울밤, 고구마말린 것을 먹으면서 놀기도 하고 남장해서 이웃 동네에 놀러가기도 했던 친구들이다. 롯데 백화점 뒤편 한정식 음식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P가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볼멘소리로 말했다. “넌 친구도 안 보고 싶은 가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고….” 일행들이 다 모이자 우리는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내 뒤를 따라오던 P가 말했다. “넌 친구가 필요하지 않는가봐.” 우리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로 근황을 물어보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말끝에 P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넌 마인드를 바꿔야 해. 책을 내면 동창회에 와서 한 권씩 나눠주고 하면 얼마나 좋아. 니가 작가인 것도 알리게 되고, 그래야 아이들이 네 책도 사볼 것 아냐. 도대체 사는 게 뭔데…. 우리 나이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 같아. 두루두루 친구들도 만나면서…. 아무튼 넌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들 말없이 젓가락질만 했다.
“그게, 그런 게 아니고… 그게 내가 게을러서… ”
나는 더듬더듬 변명을 하다가 말을 삼켰다. 셋째 주 화요일, 동창회 모임이 있는 날마다 서울에서 소설 모임이 있었다.
“근데 부산에서 동창회 모임을 하냐? 요즘 문자도 안 오던데.”
말문을 돌렸다.
“네가 안 나오니까 안하는 거지. 셋째 주 일요일에 체육대회가 있어.”
“아, 그래. 난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8년 전인가 언젠가 밀양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진영에 들러 동창회 참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 그때 너 총동창회 할 때 왔었어.”
한동안 화제는 동창회, 작년에 행시 합격된 딸 얘기, 지난 20년간 꾸준히 서예와 수묵화를 그려오면서 느낀 것들, 아이들 직장과 앞으로 있을 결혼 문제 등등으로 이어졌다. 아이들 돌잔치, 집들이, 송년회, 여름휴가, 체육대회 등등 가족 동반으로 많은 시간들을 보낸 친구들이었다. 그 와중에 2명이나 남편을 잃는 바람에 부부 모임은 흐지부지 해졌지만. “다들 잘 살고 있네.” 내가 말하자 모두들 생글거렸다. “그래, 잘 살고 있어. 네 얼굴도 좋아 보여.” 나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좋아 보인다니. 다행이네. 간간이 부부싸움 얘기, 아이와의 갈등 문제가 불거졌지만 분위기는 유연하게 흘러갔다. 식당이 마칠 즈음에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나는 눈을 감았다. 피곤이 몰려왔다. 넌 마인드를 바꿔야 해. P의 말이 머릿속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수 년 동안 파키슨 병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남편을 작년에 보낸 친구였다. 간간이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왔지만 제대로 위로 한 번 못해주었다.
그렇다. 난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 비단 친구뿐이겠는가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네들보다 소설이 먼저였고 문학 모임이 먼저였다. 어느 순간 나는 배타적이 되어 있었고 소설가들의 모임이 아니면 잘 참석하지 않았다. 집안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막내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월요일에 엄마 집을 계약한다고 했는데. 추석 때 엄마는 남동생과 분가해서 살겠다고 결정을 내렸고 얼마 전,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 여동생은 출퇴근하면서 자주 드나들기 쉽게 바로 자신의 집 근처에다 엄마 집을 얻었다고 했다. 글 쓰는 언니 대신 엄마 집 바로 옆에 살면서 소소한 집안일들을 챙겨 왔던 내 착한 여동생. “내 걱정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해라.” 부쩍 기억력이 떨어졌음에도 전화를 걸 때마다 괜찮다고 잘 살고 있다고 단단한 음성으로 말하는 엄마. 그동안 난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내가 그네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나는 카카오톡으로 여동생에게 문자를 보낸다. 엄마 집은 계약을 했니?
소설가/김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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