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작가와 밀양 시골집에 간 적이 있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동네에 빈 집이 있다는 말에 그녀는 그곳에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바람도 쐴 겸 우리는 시골에 갔고 그녀는 곧장 추락할 것 같은 옛날식 화장실을 보고는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줄곧 도시에서 살아온 그녀는 시골이 이렇게 험악? 한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튼 그날 차 안에서 그녀는 몇 번이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다음날 나는 바로 영광도서에 가서 책을 샀고 커피숍에서 읽기 시작했다. 책은 서두부터 호기심을 끌었고 문장도 술술 잘 읽혔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그때로 거슬러 가서… 몇몇 기억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위와 같이 첫문장으로 시작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0년 대 영국 케임브리지. 장래가 촉망되던 장학생 에이드리언 핀이 욕실에서 동맥을 긋고 자살한다. 철학적이고 수재였던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친구의 여자친구 베로니카에게서도. 아무도 그 자살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친구였던 토니 웹스터는 자신이 무심코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이제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 통의 편지가 엄청난 파국을 불러왔음을 알게 된다.
소설의 시작은 현실에 순응해 평범하게 살고 있는 노인인 토니가 도착한 지 한참된 편지 한 통을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그가 안주해 있던 삶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싯적 소설과 같은 삶을 꿈을 꾸었던 사춘기에 토니는 ‘데미안’처럼 놀라운 지성과 겸양을 갖춘 친구 에이드리언을 만난다. 애초 승부욕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그를 선망하고, 또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아 콤플렉스로 응어리진 분노와 배반감으로 변질된다. 무용담처럼 자랑하고 싶었던 여자친구이지만, 소유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던 베로니카의 욕망이 에이드리언에게로 향한 것을 알면서부터다. 결국 둘이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교제를 허락해달라는 에이드리언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치기와 의고적 허세가 밴 저주로 가득한 답장을 보낸다. 그것으로 그들과의 인연은 끝이 난다. 아니, 끝이 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십 년 후, 그 저주가 둘과 주변인들의 운명을 짓밟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되어 돌아온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알찬 스토리 안에 삶과 시간과 기억이라는 문제를 개인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작은 역사가 무엇이냐는 교사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라그랑주를 인용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확신’이라는 대답하는 장면이다. 사실 역사가 역사학자 개인의 해석이 담긴 허구에 가깝다는 말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토니 개인의 기억과 진실의 문제로 초점이 모이면서, 이 명제는 작가 특유의 문학적인 가치로 빛을 발한다. /김서련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