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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극수의 역사이야기

회야강변에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애환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6.08.20 19:27 수정 2026.08.20 07:27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박극수

ⓒ 웅상뉴스(웅상신문)
웅상지역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게된 것은 회야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에서 고기를 잡아 먹거리를 하고 이동과 물자수송 할 수 있는 역할도 하고 강변은 완만하여 농경생활 하기도 용이하고 식수와 농업용수로 이용하기도 가능했다. 회야강변에는 국가에서 지역 백성들로부터 받은 조세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서창에도 있었고 남창에도 있었다. 조세 보관창고가 있었던 지역의 창고 지명이 지금까지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회야강변에는 양곡 생산량이 많아 조세량도 많았고 조세양곡을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한 수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때 축성된 울주군 서생면 진하에 있는 서생산성의 위치는 회야강과 동해바다가 합류되는 지점에 축성되었고 울산 학성공원에 축성된 도산성은 태화강과 동해바다가 맞닿은 지역에 축성되었다.
왜구들이 이런 위치에 성을 축성한 것은 일본과도 가까운 거리라 전쟁에 필요한 군대와 군수물자 공급받기도 좋고 강 상류까지 배가 왕래할 수 있고 많은 백성들이 살아 강제 인력동원을 할 수 있고 넓은 들이 펼쳐있어 식량 약탈도 가능했고 강유역에는 철을 생산하는 제련터가 많았고 도요지터는 벨트를 형성할 정도였고 가지산, 대운산과 천성산에는 산림이 넉넉하였으며 강변에 농사를 지어오다 한해에도 몇 번씩 계속되는 홍수에 대비하기 위하여 견고하고 높은 뚝을 조성하는게 일상화 하다보니 강변의 백성들은 일류석공이 많았다.

철 생산 기술과 철 가공기술자, 도공, 목공, 석공, 종이 생산 기술자들이 많았다.
서생성과 도산성 축성한 일본 장수는 가토기요마사였다. 도산성 축성돌은 우리나라 백성들이 축성한 병영성 돌을 흘어 운반해와 조성하였다 한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성 축성 과정에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 백성들의 많았을 것은 말할 여지도 없다. 돌 운반 수레를 끌기위하여 우리 백성들이 사육한 우마도 강제로 탈취해갔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서생성 석축벽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희미하여 읽기가 어려운 글자가 세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글자는 축성에 동원된 우리 백성들에게 강제 배당된 작업구간의 표시라 추정된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일본 장수들의 전과 평가를 사살한 우리 군과 백성들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낸 수로 검증하고 전쟁포로 제련공, 도공, 목공, 석공, 종이생산기술자 인원수로 평가하였다 하니 성 문전 회야강과 태화강에서 기술을 발휘하며 생활한 여러분야 많은 명인들이 전쟁포로가 되어 끌려갔음은 보나마나 한 일이다.

서생성과 도산성을 축성한 가토기요마사는 일본으로 돌아가 구마모토성을 축성하였다. 축성을 위하여 우리나라 석공들을 포로로 끌고 갔을 것이다. 서생성과 도산성 축성 경험을 토대하여 설계하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도산성 전투시 일본군은 조명군사에 포위가 되어 물을 구하지 못해 오줌과 말피를 마시며 갈급한 갈증을 경험한 관계로 구마모토성 축조 하면서 120여개의 우물을 팠다고 한다. 구마모터성 주변에는 지금도 서생이란 성을 가진 분들이 살고 있는걸 보면 석공으로 끌려간 그분들의 후예일 것이다.

임진왜란시 까지는 세계에서 도자기 기술이 가장 뛰어난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이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도 우리나라와 중국을 버금가는 도자기 선진국이 되었다. 17-18세기 일본 전체 수출물량 중 70-80%가 도자기였다고 한다. 일본이 선진국이 될 수 있는 힘은 도자기 제작기술이었다. 이 기술제공은 전쟁포로가 되어 끌려간 우리나라 도공들이였다. 이 도공들 중에는 회야강 유역에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자자손손 기술을 연마해온 도공들도 여러분이 계셨을 것이다. 일본 문화재 중 국보로 지정된 도자기가 여러개가 있다. 이 예술품에도 우리 도공들의 혼이 담겨있다.

회야강은 우리들에게 삶을 터전을 제공해 주고 우리 생명을 지켜주고 보담아 주어 행복을 지켜준 곳이다. 그러나 이 행복을 시기한 무리로 인하여 뼈에 사무치는 수난을 당해야 할 때도 있었고 자연재해를 감당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회야강에 의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배가 상류까지 왕래하던 회야강이 지금은 메마른 자갈 모래 바닥인 순간이 더 많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회야강에는 많은 어종들의 서식해 고기떼들에 가려 강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항시 물이 넉넉하게 흐르고 많은 생명들이 살 수 있는 강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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