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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짧은 소설>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12.09.08 12:54 수정 2012.09.19 12:54

깨어지기 쉬운 것들/김서련 소설가

희뿌연 수증기 속으로 빛줄기가 가늘게 새어 들어온다. 따뜻한 그녀의 말이 어깨에서 느껴지고 그녀의 체취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나는 한껏 숨을 들이마신다. 경직된 내 얼굴이 한순간 열기에 풀어진다. 수증기 사이로 남편의 말이 떠다닌다. 당신을 사랑해. 나는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알몸은 땀으로 번들거린다. 수증기가 가득 찬 한증막. 그녀는 꽃무늬 수건을 바닥에 깔고 반듯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다. 그녀의 가슴 사이로 또르르 땀방울이 굴러 내린다. 하얀 살결에 적당하게 볼륨감 있는 그녀의 몸매는 숨이 막히도록 황홀하다. 나도 모르게 내 몸을 내려다본다. 지방 덩어리가 몇 겹으로 접혀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눈을 뜨고,이번엔 내가 재빨리 눈을 감는다. 수증기의 열기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나가는 기척이 들려온다. 그러자 벽 쪽을 향해 앉아 있던 H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어깨를 건드린다.

갔어. 그래 넌 언제까지 저년을 두고만 볼 거야?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어떻게 하긴,집으로 쳐들어가서 확 뒤엎어버리는 거지. 야! 황신혜가 하는 것 못 봤어? 괜히 고상 떨지 마.

H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내가 수미,그녀에게 한 말을 떠올린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이혼을 해? 남자 마음을 어떻게 해서라도 돌리든지 아니면 적당히 맞바람을 피우면 되잖아. 남편과 이혼한 뒤 아무 남자와 어울리는 그녀를 보다 못해 나는 늘 비난했다. 왜 그렇게 사냐고. 그렇게 남자가 그리우면 차라리 전남편과 합치라고. 아무리 세상이 지랄 같아도 아직 결혼은 신성하고 그만큼 지킬 가치가 있는 거라고. 거기다가 나는 큰소리를 탕탕 쳤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을 지킬 거야. 평생 한 남자를 믿고 사랑한다는 것 정말 특별한 일이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은밀한 미소를,나는 왜 보지 못했을까.

그만 자자. 남편이 침대로 온다. 나는 사진을 베개 밑으로 숨긴다. 옆자리에서 잠을 청하는 남편에게 슬쩍 말을 건넨다. 수미가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대요. 남자? 수미씨에게 남자가 어디 한둘이었나. 새삼스럽게 왜 그래? 이번에는 뭔가 좀 달라요. 글쎄,남자와 섹스 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았대요. H가 그 집에 놀러갔다가 소파에 있는 걸 보았대요. 나는 재빨리 남편의 표정을 살핀다. 잠에 취한 얼굴일 뿐 별 이상한 조짐은 없다. 괜히 확실하지 않은 소문으로 생사람 잡지 마. 그만 자자. 남편은 모로 돌아누우며 다시 잠을 청한다.

계속 시간이 흘러가고 정신은 갈수록 말짱해진다. 가볍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편. 나는 벌겋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으로 남편 등을 지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화인. 나는 한사코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린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가정과 직장 밖에 모르던,그래서 '시계불알'이라는 닉네임까지 달고 다니던 남편이 이럴 수가….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싸늘하게 뜨고,베개 밑에 있는 사진을 투시한다. 포르노 비디오를 그대로 사진 속으로 옮긴 듯한 노골적인 성애 장면. 구토가 일어난다. 이제,더 이상 참지 못하겠어.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남편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느닷없이 허공을 가르는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남편은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엉거주춤 상반신을 일으킨다. 나는 사진을 꺼내 그의 얼굴에 들이민다.

도대체 아닌 밤중에 이건 뭐야?

멍하니 사진을 보던 남편의 두 눈은 점점 크게 벌어진다.

어떻게 할까? 간통죄로 고소할까?

나는 남편 얼굴을 향해 비수를 꽂듯이 사진을 집어던지며 날카롭게 소리친다.

왜 내 얼굴이 사진에 있어? 난 모르는 일이야.

한사코 시치미를 떼는 남편의 말에 내 몸은 분노와 모멸감으로 경직된다. 내 지랄병의 초기 증세다. 이럴 때는 속에 있는 걸 모두 쏟아내야 한다. 안 그러면 발작을 일으킨다.

당장 나가. 한시도 당신과 같이 있기 싫어.

당신을 사랑해. 잘 알잖아. 그런 내가 어떻게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수미와 그럴 수 있겠어. 날 믿어 줘.

나는 남편을 힘껏 밖으로 밀어낸다. 남편은 흰자위가 반쯤 돌아간 내 눈을 보더니,뭔가를 말하려던 시도를 체념하고 순순히 밖으로 나간다. 비열한 인간. 나는 문을 꽝 닫는다. 모든 게 끝났어.

오늘은 제발 이야기를 좀 하자며 남편이 전화를 걸어온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놓으면서 우린 끝이야,말을 씹어 내뱉는다. 그 순간 가슴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도려낸 것처럼 가슴이 후련해진다. 마치 오랜 전부터 원해 왔던 것처럼. 수미도 이혼할 무렵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증막으로 들어가 바닥에 벌렁 눕는다. 살과 뼈를 녹이고 싶다는 심정으로 열기를 내 몸으로 흡수한다. 이대로 누워 있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여자 두 명이 목소리를 죽여가며 수다 를떨고 있다. 글쎄,이제 보니까 우리 남편 것은 물건도 아니야. 어제 그 남자 봤지? 생긴 것과 달리 엄청 크더라. 테크닉은? 휴,말도 마. 세 번이나 까무러쳤어. 홍콩 간다는 말을 정말 실감하겠더라.

나는 여자들을 힐끗 바라본다. 꼴값하게 생겨먹은 얼굴들이다. 까르르 웃으며 여자들이 나가고 나서야 나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때 누군가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본다. 그녀다. 나는 얼른 눈을 감고 못 본 척한다.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웅크리고 앉는다. 순간 몸이 경직되고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정신이 명료해진다.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 없어. 네 년의 머리카락을 몽땅 뽑아버리고 말 거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발딱 일어나는데,그녀가 날 향해 피식 웃는다.

그 사진 봤어?

장난기가 배여 있는 음성이다. 도대체 뭐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갑게 반문한다.

무슨 사진?

호호,모르는 척 하긴. H가 가져간 사진,합성 사진이야. 그러니까 다른 남자의 몸에 니 남편 얼굴을 붙인 거지. 넌 몰랐구나. 요즘 웬만한 아이들도 다 아는데…….

무슨 소리야.

니 남편한테 너무 매달리는 것 같아 장난을 좀 쳤지. 너무 심했나. 어제 니 남편,회사 근처에서 봤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 이 담에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런데,넌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은 지켜야한다면서…….

희뿌연 수증기 속으로 빛줄기가 가늘게 새어 들어온다. 따뜻한 그녀의 말이 어깨에서 느껴지고 그녀의 체취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나는 한껏 숨을 들이마신다. 경직된 내 얼굴이 한순간 열기에 풀어진다. 수증기 사이로 남편의 말이 떠다닌다. 당신을 사랑해. 나는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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