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박극수의 역사이야기

웅상 역사이야기-3/양산시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명동마을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2.06.20 11:33 수정 2022.06.20 11:33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박극수

↑↑ 명동마을회관
ⓒ 웅상뉴스(웅상신문)
명동마을 가앳질(現명동공원)에는 4-5세기경 조성된 고분군이 많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그 때부터 집단 마을을 형성해 생활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명동고분군 근처에서 출토된 유물 다수를 양산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명동마을 곳곳에는 선조들이 문화의 꽃을 피우며 살아 온 흔적이 많다. 가앳질 곳곳에 도굴 흔적이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도굴된 유물은 해외로 많이 유출되고 국내에서도 고가로 매매되고 있다고 한다.

시명사는 지금 보광사로 절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절에는 절 건립시 발굴된 신라 말 고려초 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제작 연대가 고대의 유물이라 귀중한 유물임이 틀림없다. 문화재로 등록하도록 조치해야한다. 도요지터는 솔밭골, 남낙골, 산지앞, 널통골에 있다. 솔밭골 도요지는 발굴하여 발굴된 유물은 양산박물관 수장고에 관리되고 있다.

↑↑ 741년된 당산나무(느티나무)
ⓒ 웅상뉴스(웅상신문)
철을 제련한 흔적이 있는 점터가 있다. 제련한 터에는 농기구 생활용품을 제작하였고 임진왜란때는 이곳에서 제작한 무기를 의병에 출병한 병사들에게 공급하였다 한다.
박지영은 무안군수를 역임하고 관직 생활을 하다 벼슬을 버리고 1550년경 명동에 입향하여 친족들과 이웃들에게 문무를 가르치며 나라가 위난에 처하면 가장 우선으로 이에 대응해야한다는 훈화를 해왔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별세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박홍남, 조카 박홍춘, 사위 김응방 생질 이겸수, 종손자, 종질 등 젊고 혈기있는 인척들은 모두 의병장이 되어 구국 일념으로 임하여 울산 선무 원종 공신록에 등재되고 임란 공신으로 추대되어 울산 충의사에 배향된 유복지친이 12명이 배향되었다. 공신록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혈기 있는 젊은 인척은 모두 의병으로 출병해 전쟁에 임했다. 전선에 나아가지 않은 노약자들은 전쟁물자 공급에 전력을 다했다.

↑↑ 명동마을 사거리
ⓒ 웅상뉴스(웅상신문)
당시 웅상은 울산군 서면이었다. 서면에 거주한 주민은 임진왜란에 모두 희생을 다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받은 왜구는 서면 가가호호를 수색하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육하고 가축과 식량을 닥치는대로 탈취해갔다. 주민들은 산속이나 울산 등지로 피신을 하고 명동 주민들은 원효대사가 대운산, 천성산, 금정산을 왕래할 때 다닌 길목인 대운산 시명골에 피신을 했다.
현 명동공원은 도시계획상 주거지역으로 계획되고 현 출장소 일대는 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울산 박씨 명동 문중 종원들이 중심이 되고 지역민의 협조를 얻어 도시계획을 교환 변경 해 명동공원은 공원지가 되고 현 출장소 일대는 주거지역이 되었다. 공원 지역으로 지정될 토지가 주거지역으로 지정되어 지가가 엄청 상승하여 재산 증식이 된 심완조씨와 장명식씨는 양산시에 출장소 부지와 문화체육센터 부지를 기증했다. 기증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은 도시계획의 변경으로 인한 것이다.
시명골 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건립하였고 여러 차례 공사를 하다 홍수가 나면 시명골 아흔아홉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감당하지 못해 쌓아둔 둑이 무너져 끝내 막지 못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국가가 어려워 공사계획을 하지 못하고 있다.

↑↑ 웅상농청장원놀이 전수관
ⓒ 웅상뉴스(웅상신문)
1963년경 미국의 남은 농산물 밀가루 원조로 저수지를 건립했다. 원조로만 예산이 부족하여 몽리주민들이 부족한 예산을 각출해 지출하기도 하고 인력 동원도 하며 피눈물로 이룬 저수지이다.
이 때 공사를 하다 수해 피해를 두 번이나 당해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포기하지 않고 공사기간을 연장해 가며 1968년 끝내 완공했다. 농업용수 목적으로 건립한 저수지를 목적대로 이용하다 1995년경 평산 봉우 태원아파트 일대 지하수에 의존하던 식수와 생활용수가 고갈되어 전쟁 난민 수용소보다 어려운 생활을 하는 처지가 된 점이 있다.

이 때 명동주민들은 정부에 건의해 시명골 저수지 물을 아파트에 공급하도록 하고 대신 시명골 저수지 물을 이용하는 농지 중 경지 정리가 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거지역으로 도시 계획 변경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회야댐으로 가는 낙동강물을 장흥에 있는 웅상정수장에 유입하여 정수해 웅상 전역에 공급하는 시기가 앞당겨 설치되었다. 주거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을 지역민들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개설된 도시계획도로와 공원은 양산시에 기부 채납했다.
서창동 안에 개설한 계획도로와 공원은 정부의 지원없이 80% 시민들이 토지와 개설 비용을 감당하였다. 명동 주민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웅상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학교는 명동마을에 설립된 웅상초등학교다. 명동은 위치적으로 웅상에서 가장 중심에 있기도 하지만 학교 설립시 대다수 부지를 주민들의 자발적의사로 용지 확보가 무상으로 되어 학교가 명동에 설립될 수 있는 주된 원인이다. 현 개운중학교 설립인가도 웅상학원이란 교명으로 웅상초등학교에서 인가를 받아 웅상초등학교 교정에서 수업을 하다 현 웅상출장소 자리에 교사를 지어 2년간 수업을 하다 현 개운중학교 위치로 이전했다.

↑↑ 명동마을 경로잔치
ⓒ 웅상뉴스(웅상신문)
웅상농청장원놀이는 쌀, 보리농사 영농방법을 풍물놀이와 농요를 작품화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받아 정부 지원으로 전수관을 건립하여 유지 보존해간다. 문화재로 지정받는 과정도 명동마을 주민들은 너무나 많은 힘을 들였고 유지보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명동주민들의 끈기와 화합의 힘으로 감당하고 있다.

명동마을의 옛 지명은 명계 명동 명곡홈실이라 했다.
읍이 동으로 분동됨으로 인하여 주소가 양산시 명곡동이라 불러야만 했는데 옛 양산읍 지역에 현 동원과학대학이 있는 마을 양산시 명곡동이라는 마을이 있어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로 표기하면 같은 글자가 되고 육성으로 불러도 같은 발음이라 옛 지명인 명동마을로 칭하기로 마을명을 바꾸게 되었다,
옛 명동마을은 외홈마을 현 볼링장에서 화성아파트까지 큰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이 얼마나 부유하고 정비가 잘 된 마을이었는지 장마철에 우의를 사용하지 않고 버선발로 걸어도 흙 한방울 버선에 튕기지 않았고 큰집의 처마가 길까지 나와 비 한방울 맞지 않고 마을 어귀에서 마을 끝나는 지점까지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 옛 명동공원
ⓒ 웅상뉴스(웅상신문)
마을이 있었던 흔적은 토지구획정리사업 이전에 와편 토기편들이 곳곳에 눈으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신라 초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이 없어진 시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경일 것이다. 필자의 6대조부님의 4형제분들이 명동마을에 살다 맏형과 둘째형 되시는 분은 백동마을로 옮겨 살게 되었고 셋째와 넷째분은 명동에 살았다는 기록과 명동에 살 때 여러 명의 노비를 거느리며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 시기가 19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마을이 부유하고 인심이 넉넉하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외홈마을 중앙병원 명동천 건너편에는 걸인들이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평소에도 기백명이 상시로 살았지만 흉년이 들면 영남 일원의 걸인들이 다 몰려와 인근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고 생명을 지켰다고 한다. 주변마을에는 흉년이 들어도 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사정이 되었고 인심도 훈훈하여 걸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다. 걸인 마을은 1980년경까지 형성되어 있다가 없어지게 되었다. 당시 걸인 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성실한 시민이 되어 살아가는 이가 몇 사람있다. 그분들의 자녀들도 모범시민으로 아름답게 잘 살아가고 있다.
↑↑ 빅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 웅상뉴스(웅상신문)


저작권자 웅상뉴스(웅상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