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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기억의 현장] 장사상륙작전, 학도병이 지킨 200고지

김경희 기자 입력 2025.09.08 11:58 수정 2025.09.08 11:58

철수선은 오지 않았지만 끝내 총을 놓지 않았다

장사 해안에 정박한 문산호 전시관 전경. 1950년 장사상륙작전에서 학도병 772명이 탑승했던 함정을 기념하며, 지금은 국민에게 희생의 의미를 전하는 공간이 되었다.

1905년 9월, 한반도 전세는 벼랑 끝에 놓여 있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난 국군과 유엔군은 단 한 번의 반격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적의 시선을 분산시킬 양동작전이 필요했다. 그 임무가 경북 영덕 장사 해안에 떨어졌다.

작전명 제174호, 주인공은 독립 제1유격대대, 일명 ‘명부대’라 불린 학도병 부대였다. 대구와 밀양에서 모여든 760여 명의 소년들은 제대로 된 군사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태풍으로 거센 파도를 뚫고 LST 문산호에 몸을 실었다. 목표는 북한군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출정식은 화려했다. 육군본부 앞 광장에서 군 장성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년들은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부산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을 삼킨 것은 폭풍우와 포화였다. 문산호는 태풍에 휘말려 좌초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젖은 몸으로 200고지를 향해 뛰어올랐다.

9월 14일 새벽, 유격대원들은 장사 해안에 상륙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윽고 ‘200고지’를 점령했지만 전투는 곧바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북한군의 반격이었다. 9월 16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반격은 박격포와 전차까지 동원한 치열한 공세였다. 새벽 어둠을 가르고 쏟아진 포탄 속에서 수많은 학도병이 스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고지를 사수하며 저항했다.

영덕 장사 해안에 조성된 LST 문산호 전시관. 당시 학도병과 유격대가 탑승했던 문산호를 실물 크기로 재현해 내부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상륙작전은 원래 사흘간의 임무로 계획되었으나 ‘오지 않은 구호선’은 이들의 운명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육군본부가 약속했던 철수 지시는 전해지지 않았고 지원은 끊겼고 실탄은 바닥나고 대원들은 허기와 피로에 지쳐갔다. 그럼에도 학도병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총을 놓지 않았다.

결국 9월 19일, 일부 생존자만이 조치원호에 실려 부산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6일간 이어진 작전은 수많은 전사를 남겼고 살아 돌아온 이는 극히 적었다. 장사 해안에는 772명의 학도병들의 이름 없는 희생이 남았다.

생존자 배수용 참전용사의 증언은 이 희생의 무게를 전한다. “사람으로서는 겪지 못할 고비를 겪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화면을 통해 울려 퍼지며,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동무들을 두고 떠나야 했던 심정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오늘날 장사상륙작전 전시관은 그날의 기록을 되새기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패널에는 ‘호국의 기상’, ‘북한군의 반격’, ‘오지 않은 구호선’, ‘유격대를 구하라’ 등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6일간의 여정을 따라가며 관람자는 소년들의 마지막 발자취와 마주한다. 특히 철수 직전까지 이어진 고지 방어전은 끝내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의지를 증언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뒤편에는 장사 해안의 짧고 치열했던 작전이 있었다. 전략적 효과는 분명했다. 적의 병력을 동해안으로 끌어들여 인천의 돌파구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사상륙작전의 진정한 의미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학도병들의 희생 속에 있다.

장사 해안에 서면,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된다. 이 희생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 “그들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다.” 전시관의 문구처럼, 그것은 나라를 지키려는 불타는 의지였고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지켜낸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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