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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 생활을 기념하는 공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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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배 공간 전경. 앞의 초가집은 송시열이 실제 기거하던 유배집이며, 뒤편 기와집은 주인집으로, 위리안치 형식의 구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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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 일출로 잘 알려진 포항 장기.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조선 유배문화의 심장부였다. 광대한 행정 구역과 철저한 이중 감시망을 갖춘 장기는 조선시대 대표적 유배지로, 220명 이상의 선비와 학자가 머물며 고난 속에서도 학문을 잇고 사유를 이어간 현장이었다.
조선시대 장기는 단순한 해안 고을이 아니었다. 당시 장기현은 경주 감포·양남·양북에서 호미곶까지 이어지는 해안선과 오천천·연일 등 내륙까지 관할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오늘날 호미곶등대 역시 과거에는 ‘장기등대’라 불렸을 만큼 장기현의 행정적 영향은 넓고 강했다.
이곳이 유배지로 지정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읍성 안에는 현청이 있어 육지에서 죄인을 관리했고, 해안에는 수군 만호진이 자리해 해상 도주를 차단했다. 육지와 바다를 동시에 감시할 수 있는 이중 관리 체계 덕분에 장기는 유배지로 최적지였다. 특히 섬이나 국경지대에 보내기 전, 중형 이상의 죄인을 수용하는 전초지 역할을 했다.
조선의 유배 제도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은 ‘유삼천리(流三千里)’였다. 도성에서 삼천리나 떨어진 먼 곳으로 보내는 형벌로, 실제 거리 대신 역참(驛站) 서른 곳을 지나는 것을 삼천리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실제로 글자 그대로라면 열 리는 약 4km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배 거리 산정에서는 심리를 약 25~30km로 환산해 계산했다.
실제 거리와 행정 거리 사이에 큰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의 유배 제도에서는 ‘삼천리’는 실제 지리적 거리를 의미하기보다는 권력과 사회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린다는 상징적 장치였다. 장기가 대표적인 유삼천리 유배지로 기록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맞닿아 이싿.
전국 유배지는 약 200여 곳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경상도가 가장 많았다. 장기에는 220명 이상의 유배인이 내려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초의 사례로는 원나라 출신 외교관 설장수가 전해진다. 그는 고려·조선 초기 정권 교체 과정에서 유배와 소환을 오갔고, 훗날 우리나라 설씨의 시조로 이어졌다.
유배형은 선고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출발 전 장(杖) 100대를 맞는 것이 관례였고, 경제력이 있으면 대행을 세우기도 했다. 유배인은 현지 민가에 기거했지만, ‘위리안치(圍籬安置)’라 하여 탱자나무 울타리 등으로 둘러친 울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재력이 있으면 식솔을 동반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홀로 내려와야 했다.
정약용 역시 1801년 신유박해 때 처음 장기에 유배되었다. 약 220일간 머무른 짧은 체류였지만, 그는 백성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민간요법을 기록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강진 유배 시절 집필한 『마과회통』(천연두 치료서)과 『제중신편』(백성을 위한 의학 입문서) 등 의학 저술의 밑바탕이 되었다.
장기는 단순히 벌의 땅이 아니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학자들이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고, 그 영향으로 지역은 학문을 중시하는 풍토를 이어가게 되었다. 유배는 고난의 형벌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학문과 문화가 싹텄다.
오늘날 장기에는 유배문화를 기념하고 교육하는 공간이 조성돼 있다.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은 벽화와 기록관, 유배길 체험로를 통해 당시의 생활을 보여준다.
장기읍성은 성곽 1.3km가 복원돼 옛 현청 터를 확인할 수 있으며, 100년 넘는 역사의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 송시열이 심었다 전해지는 은행나무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장기는 조선 유배문화의 산실이다. 벌의 땅이자 동시에 학문과 문화가 이어진 공간, 고난이 지혜로 바뀐 현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곳에서 지역의 정체성을 되새기고, 미래 세대에 전할 문화유산의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