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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예술

[양산, 시간을 걷다①] 양산학춤, 몸으로 전한 기도… 김장수의 춤 한평생

김경희 기자 입력 2025.06.19 08:31 수정 2025.06.19 08:31

정중동의 미학으로 이어온 양산학춤
여러 번 문화재 지정 무산
다음 세대 반드시 이어야 할 유산

↑↑ 양산학춤

양산에는 오래도록 입에서 몸으로 전해온 춤이 있다. ‘학의 품격과 선비의 기품’을 담은 양산학춤. 이 전통춤을 긴 세월 가까이 지켜온 전승자 김장수 선생을 양산민속예술보존회에서 만났다.

유월 어느 날 오후 2시, 주소를 찍고 가니, 네비게이션이 산을 향해 길을 틀었다. 살짝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자 넓은 주차장과 고풍스러운 건물 그리고 어디선가 신명나는 장구 소리가 들려왔다. 저절로 흥이 났다. 그곳은 바로 양산민속예술보존회였다.

이날 김장수 선생의 제자들은 양산학춤을 비롯해 호걸양반춤, 연등바라춤 등을 시연했다. 그들은 흰 도포 자락을 날리면서 춤을 추었고 김장수 선생을 비롯해 몇몇은 신나게 반주를 했다. 다음은 김장수 선생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김장수 양산학춤 전수자

-선생님께서는 양산학춤을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그게 처음에는 지심풀이 공연 때였어요. 제가 장구도 치고, 소리도 했지요. 무대 맨 마지막에 그 학춤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는 춤이라는 게 단순히 몸짓이 아니라 ‘기도’ 같다고 느꼈어요.

사실 제 스승님이신 김덕명 선생님이 8살 때부터 ‘금번’이라는 곳에서 춤을 배우셨거든요. 금번은 옛날 기생들을 가르치는 학원 같은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어릴 때부터 몸에 춤을 새기신 분이었어요.

그 선생님이 학춤을 출 때 보면, 체격도 크신데 손놀림이 어찌나 섬세한지… 아직도 제가 그 손끝 하나를 못 따라갑니다. 그때부터죠. ‘아, 나도 이 춤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그냥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그분의 숨결을 쫓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선생님께 양산학춤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양산학춤은 제 삶의 중심입니다. 이 춤을 출 때면 내 몸이 학이 되어 날아갑니다. 마음으로 추는 게 아니라, 뼈로 추는 춤이에요. 손끝 하나, 눈빛 하나에도 학의 기품이 스며 있어야 하죠. 정적인 듯하면서도 안에서는 끊임없이 흐르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양산학춤은 단지 동작을 외워서 재현하는 춤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선비의 절제와 고고함, 자연에 대한 경외,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담아내는 철학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춤을 출 때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에요. 학이 되는 거지요. 내가 학이 되어 하늘을 가르고, 바람을 타고, 때로는 내려앉는 겁니다.

저는 이 춤을 그냥 ‘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몸으로 전하는 기도이고, 정신을 태우는 예술입니다. 그래서 매번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마음을 다잡습니다. 나 하나 잘 추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춤이 가지고 있는 정신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니까요.

↑↑ 호걸양반춤

-양산학춤은 다른 전통춤과 어떻게 다른가요?

가장 큰 차이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작이 느리고 절제돼 있지만, 그 안에는 감정과 정신의 흐름이 아주 강하게 담겨 있지요.

양산학춤은 총 24사위로 구성돼 있는데, 학이 하늘을 나는 모습에서 유래한 만큼, 땅과 하늘을 오가며 방향을 전환하고 균형을 세우는 동작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 바람을 띄우는 사위’, ‘날아가는 사위’ 같은 동작은 단순한 모방이 아닙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복식도 중요합니다. 복건과 학탈, 낙낙한 도포 자락, 허리띠까지 모든 구성품이 상징성과 미감을 함께 갖고 있어서, 시각적으로도 아주 완결된 춤입니다. 이건 그냥 몸으로만 추는 춤이 아니라, 보는 이도 그 안에 깃든 정신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문화재 지정이 수차례 무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 보십니까?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연석회의도 여럿 열렸고요. 하지만 내부의 갈등, 행정적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분위기들이 겹쳐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무형문화재라는 건 어느 한 사람이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한 뜻으로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누가 더 잘났느냐’를 따지기보다는 ‘이 전통을 어떻게 함께 보존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했는데, 그 부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세대에서는 어려울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음 세대가 다시 한 번, 더 열린 마음으로 이 춤을 문화유산으로 되살려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전수 활동은 어떻게 이어가고 계신가요?

지금은 양산문화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여성 제자들이 많아요. 남성 전수자는 점점 드물어지는 게 현실입니다. 사실 원래 학춤은 남자춤입니다. 동작의 무게나 품을 담아내려면 남성의 체격 조건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요.

그래도 요즘 제자들 중에 참 춤을 잘 추는 젊은이가 있어요. 그 친구는 눈빛부터 다릅니다. 제가 지금은 그 친구를 좀 키워보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중요한 건 실력보다도 ‘끝까지 버티는 힘’입니다. 전통은 그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몫을 다해, 끝까지 무대를 지키는 것. 그게 제일 어렵지만,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양산학춤이 문화재로 지정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춤은 단순히 한 지역의 민속춤이 아닙니다. 한국 전통춤의 정수가 오롯이 담긴 예술입니다. 1987년에는 일본 NHK ‘세계춤 종합평가’ 프로그램에서 ‘춤의 황제’라는 찬사를 받았고, 1989년에는 KBS ‘한국의 백경’에도 선정됐습니다. 해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던 춤인데, 아직까지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화재 지정은 단지 명예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을 공적인 가치로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기반입니다. 저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고, 그게 제 평생의 바람입니다.
연등바라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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