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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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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로 웅상 주민들이 이룩한 일 중 전국에서도 찾기어려운 일들이 많다.
1950년 6.25 동란시 보도연맹에 가입한 국민들을 재판의 절차없이 가입동기도 한마디 질문하지 않고 각 지역마다 경찰서장의 직권으로 강제 체포해 집단 학살시켰다. 보도연명 가입자 중에는 자신이 가입한 사실도 없는데 가입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도연맹이란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도 모르고 무지하고 배고픈 백성들 중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보리쌀 한되를 준다는 사실에 현혹되어 가입한 사람도 많고 웅상에는 대운산과 천성산에 빨치산 부대가 주둔하여 이들에게 군수물자 공급이 어려운 순간이 많아 식량이 떨어지고 춥고 배가 고프면 산자락 마을에 총칼을 들고 내려와 집집마다 다니며 쌀과 소금, 된장, 성냥과 가축을 달라고 하면 경각에 달린 생명에 위협을 느껴 어쩔 수 없이 내어준 사람들도 빨치산 협조자와 내통자로 몰려 보도연맹 가입대상자가 되었다. 본의 아니게 이런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아 웅상에는 보도연맹 가입자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전국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학살당하는지도 모르면서 집단으로 처참하게 죽엄을 당해야 했다.
당시 양산경찰서 웅상지서장으로 근무한 오강환 선생님의 살신성인 정신으로 인해 웅상 보도연맹 가입자 전원은 학살 직전에 모두 구출되었다. 오강환 지서장은 웅상 보도연맹 가입자 전원을 체포하여 양산경찰서로 급히 이송하라는 여러차례 빗발치는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웅상 보도연맹 가입자 명단과 가입원서를 모두 소각해 버리고 자신은 계엄사령부로 처형 당하러 간 사실로 인하여 웅상에는 보도연맹 희생자가 한명도 없게 되었다. 이런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한 일이다.
1950년 6.25 전쟁통에 웅상에는 사립 개운중학교가 설립되었다. 정부에서는 전쟁 감당하기도 힘에 겨워 기존 학교도 수업을 중단할 시기에 신설 사립학교에 도움을 준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시기에 웅상 주민들은 교실도 없이 교사도 없이 학생을 모집하여 정식 중학교 과정의 수업을 시작했다. 교실은 웅상초등학교 교실을 빌리고 교사는 교사 능력이 있는 지역민의 무임금 자원봉사를 받고 웅상초등학교 교사들의 협조를 받아 수업을 하다 임상수 선생님이 자기 전 재산을 개운중학교 설립에 기증하셨다. 기증한 토지는 현 소주공단이 조성된 우불등 일대 토지, 현 웅상출장소 부지 진등 일대 토지, 현 개운중학교 일대 토지 백만여평의 토지를 기증하시고 이외 많은 사재를 기증하셨다.
그때 개운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았다면 당시 웅상에 거주한 현 70세 이상 분들의 대다수 학력은 국졸이었을 것이다.
1969년 전종태 선생님은 소남마을에 웅상재건중학교를 설립해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하지 못하는 향학열이 높은 학생들을 모집하여 주경야독으로 일체 학비 부담없이 무상으로 교육을 했다.
교사들은 현직에 봉직하는 교사와 교사 능력이 있는 분들이 무임금 자원봉사하였다. 웅상재건중학교는 10여년간 운영하다 정부가 중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지역민들의 소득이 증대되어 폐교하였다.
울산 시민 식수원 확보를 위하여 회야강 하류에 설립한 회야댐은 1981년 건설부 사업인가를 받아 ADB차관 자금으로 1982년 12월 31일 착공하여 1986년 5월 14일 준공되었다. 댐 준공 즉시 1986년 7월 20일 건설부 제312호에 의거 회야댐 상류지역인 웅촌 전역과 웅상지역 용당 일대가 환경보존지역으로 확정되고 웅상전역이 환경보존 지역과 수원보호 구역으로 지정할 계획을 확정하고 확정고시를 위한 행정절차 진행중일 때 환경보존지역 지정 취소와 수원보호구역 계획 취소를 해 달라는 투쟁을 하기 위하여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투쟁위원장에 박봉수님을 추대하였다.
투쟁 활동은 5여년간 계속적으로 적극 추진하여 1991년 건설부로부터 집단 수원보호구역 계획확정 지역이 취소된 지역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1호라는 통보를 받았다.
투쟁 과정상 여러차례 중앙부서 광장과 지방에서 집단 시위도 하고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관청은 문이 달토록 방문하여 사정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과정에 경비도 많이 소요되었다. 당시 웅상 토지 가격이 1만원 정도 할 시기에 5천만원 정도 소요되었다. 경비 모금은 어느 누구에게도 개별 요청한 예도 없었고 경비 모금을 위한 통장을 개설하였다는 사실을 마을마다 이장을 통해 1회 방송한 것이 전부였다. 모금 통장 개설한 당일 무기명으로 3명이 500만원씩 1,500만원이 입금되었다.(당시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아 무기명 입금도 가능했다.)
백만원부터 천원을 헌금 한 분도 있고 일주일 만에 오천만원이 모금되어 그 이상 모금은 중단했다. 당시 5천만원은 웅상 토지 5,000평 값에 해당된다. 현재 웅상토지 5,000평 값은 평당 200만원으로 환산해도 100억원이 된다.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은 주민들의 지식 수준도 엄청 향상되었고 소득도 많이 높아졌지만 지금 당시와 유사한 일이 발생하여 토지 5,000평 값을 모금 한다면 그때처럼 가볍게 모금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당시 정권은 전두환 시대였다. 추진에 앞장선 분들이 당한 고통과 모멸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때 투쟁하지 않고 정부정책에 순종했다면 웅상은 지금까지 인구 1만여명이 되는 웅상면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1995년경 평산 봉우, 태원아파트 일대에 지하수를 굴착하여 식수와 생활용수로 이용하였다. 주변에 새로운 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계속 지하수를 굴착하여 용수를 해결하다보니 한정된 지하수는 고갈되어 인근 몇천세대의 아파트가 물난리를 당해야 했다. 고층아파트에 식수는 구입해 먹는다 해도 수세식 변소의 용변처리와 생활용수가 떨어져 세수도 못하고 설거지도 할 수 없는 전쟁 난민수용소와 다를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해결책을 강구해 달라는 강력한 요청을 하다 몇사람이 구속되는 사례까지 발생하였다. 갖은 방법을 연구하다 명곡 시명골 저수지 몽리 농지 100% 절대농지 20만평을 도시계획상 주거지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약속한다면 시명골 저수지 물을 평산마을 아파트에 공급하겠다 하니 농수산부에서는 시명골 저수지 물을 아파트에 공급하는 기간 동안은 저수지 몽리 농지 경작을 중단하고 매년 생산량 전량을 정부에서 지주들에게 보상해 주고 정수장 설치가 완료되어 아파트에 용수 공급할 시기와 같이 저수지 몽리 농지 전체를 경지 정리를 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몽리민들은 주거지역이 해법이다 주장해 박봉수 도의원은 김혁규 지사와 논의하여 주거지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약속하고 시명골 저수지 물을 아파트에 공급하였다. 주거지역으로 지정하는 과정은 너무 험난했다. 시명골 몽리지역 절대농지가 타 용도로 지정될려면 경상남도 어디엔가 시명골 저수지 몽리 농지만큼 절대농지를 지정해야 하는데 이 문제도 도지사가 해결하였다. 특히 울산지역 출신 강길부 건교부 차관과 김태수 농수산부 차관이 많은 관심을 보태 큰 힘이 되었다. 본 사안으로 인하여 장흥마을에 위치한 웅상정수장이 앞당겨 유치하게 되었다.
1997년 손유섭 시장 재임시 도시계획 기본계획이 현 웅상출장소와 문화체육센터 일대는 공원지로 확정되고 현 명동공원 울산박씨 명동문중 선산 일대는 주거지역으로 확정되었다.
박봉수, 박일배, 박극수는 문중원들을 설득하여 문중 선산 일대를 공원지로 지정하고 웅상출장소 일대를 주거지역으로 교환 지정하여 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고 단 조건은 웅상출장소 일대 지주들을 만나 일대 토지가 주거지역으로 지정된다면 소유한 토지 중 10%를 공용청사 용지로 양산시에 기부채납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건의하기로 하고 토지 소유자 장명식(부산), 심완조(서울)를 찾아가 만나 확실하게 기부채납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울산박씨 명동문중 대표 박장식, 박인수, 박봉수, 박일배, 박극수는 양산시장 손유섭 도시개발단장 이종출, 도시계획계장 박종서, 양산시 도시계획 용역을 맡은 원방 대표를 만나 도시계획 변경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양산시 관계자와 용역회사에서는 적극적인 자세로 업무에 임하여 관계 관청과도 원만하게 협의하여 요청한 대로 도시계획 변경이 확정되었다.
토지 소유자들은 약속한대로 토지를 양산시에 기부채납하고 이 토지에 웅상문화체육센터가 건립되고 웅상출장소가 건립되었다. 명동공원 부지 중 많은 부지가 울산박씨 명동 소유 토지임에도 양산시에서는 일체 토지사용료를 지불하지 않고 무료로 사용하고 있으며 문중에서도 사용료를 요청하지 않는다. 웅상출장소 준공식과 명동공원 개장식 때 나동연 시장은 울산박씨 명동문중 대표에게 감사패를 수여하였다.
2019년 웅상발전협의회(회장 박극수)에서는 웅상소방서와 웅상경찰서를 유치 추진을 하기로 결의하고 추진위원장에 박극수, 사무국장에 이채도를 추대하여 추진하였다. 유치 추진을 위하여 서형수 국회의원, 성동은 경남도의원, 서진부 양산시의회 의장, 박일배 시의원, 이상정 시의원, 김경수 경상남도지사, 김일권 양산시장과 매월 2회 이상 정기적으로 모여 추진 사안을 촉구하고 논의하였다.
양산소방서와 경찰서 실무자에게 웅상의 위치나 역사성이 독특하고 경상남도 10개군 중 평균 2개군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세수 또한 2개군을 능가하는 지역이라 설명하고 웅상소방서와 웅상경찰서 유치가 절대 필요하다는 소견서를 상부 관청에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간곡하게 여러차례 하였음에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줄 알면서도 소견서를 제출하면 질책만 당한다고 하며 소견서 제출도 주저하는 사안을 이룩해 내었다.
웅상소방서, 경찰서 유치 확정을 하고 명동 석호가람휘아파트 남쪽 방향 일대 농지에 위치를 확정하고 토지매입 절차중이다. 소방서, 경찰서 추진 당시 양산서장을 재임했던 박천수 서장은 경무관으로 진급하였고 웅상출장소 행정팀장 이용수는 사무관으로 진급하였다. 소방서, 경찰서 유치 업무에 협조한 자세로 보아 당연하게 승진해야 할 사람들이 승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웅상주민들에 의하여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
<문화재 문화재명 지정일 문화재지정 제출자>
우불신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87호 1991년 12월 23일 우불신사보존회장 이준걸
웅상농청장원놀이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23호 2002년 4월 4일 웅상향토회연구회장 이태걸
우불산성 경상남도기념물 제259호 2005년 10월 13일 영산대학교향토문화연구회장 박극수
삼호리 고분군 경상남도기념물 제260호 2005년 10월 13일 영산대학교향토문화연구회장 박극수
위 문화재를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 받는 과정에 자료수집과 신청서를 해당 단체 책임자들이 감당하였다. 양산시청과 경상남도 관계 공무원들의 임하는 자세는 적극성을 전혀 찾을 수 없고 업무만 피하면 능사라는 자세로 임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빌미만 잡아 반려 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전문가라는 심사위원들도 학자로서 자세는 찾아볼 수 없고 시장판의 장사치보다 못한 자세로 임한 위원도 있었다. 몇 차례 반려에 반려를 거듭하며 몇 년이 걸려 이루어 내었다. 아쉬운 부분은 경상남도 무형문화제 제19호인 원동 가야 용신제는 국가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웅상농청장원놀이는 단원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노령화하여 작품활동이 어려운 사정임에도 기존 회원들과 소수 증원을 하였을 뿐이다. 영산대학교 부구욱 총장, 개운중학교 송영태 교장 같은 분들은 웅상농청장원놀이 임원들의 동참 협조만 구하면 학생들도 활동에 다수 참여하여 전수에 힘을 보태겠다고 함에도 기존 회원들만 고집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금과 동면 사송지구는 공영개발에 의하여 택지가 조성되었지만 웅상은 공영개발에 의한 택지는 극히 일부분이고 90% 이상이 택지조합을 구성하여 택지개발이 이루어졌다.
지주들이 모든 공사비를 감당하고 도로, 소공원과 공공용지를 조성하여 양산시에 기부채납하였다. 웅상에서 가장 큰 도시계획도로 대운로(4차선) 70% 이상을 주민들이 조성하였고, 간선도로 80%는 주민들이 조성하였다. 웅상에서 가장 큰 도시계획도로 번영로(6차선) 60% 이상을 주민들이 조성하였다. 이러다 보니 웅상 도시조성은 짜깁기식으로 조성되었다.
웅상은 4개동으로 분동되 도시지역이 되어 농어촌 혜택이 취소되어 직간접으로 추가된 공과금 액수가 양산시에서 웅상에 투자하는 금액보다 훨신 많은 금액을 능가할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