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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 때 웅상의 정의로운 자 같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길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4.12.30 13:04 수정 2024.12.30 13:04

박 극 수
시인. 양산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
웅상신문 칼럼위원

ⓒ 웅상뉴스(웅상신문)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때 이규락씨와 박일호씨

이웃한 집 건너에 사신 이규락 어른과 박일호 어른 삶의 모습은 필자가 태어나 기억할 수 있는 때부터 그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온 사이였기에 너무 소상하게 보아왔다.
이규락씨란 분은 1920년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해 1925년경 가족들이 웅상면 명곡리로 이주해 와 자라셨다고 하며 2005년 86세 연세로 돌아가신 분이다.
박일호씨란 분은 이규락씨와 같은 해 웅상면 백동마을에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해 웅촌면 석천리에서 자라게 되어 20대 후반까지 살다 1949년경 웅상면 명곡리에 이주해 와 사시다 1990년경 70여 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두 분의 가문은 학성이씨와 울산박씨로 웅상에서 제일 많은 집성을 이룬 가문이었다. 이규락씨는 벼 300여 석을 수확하는 부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분이다. 웅상초등학교 설립했던 1927년에 입학하여 4학년을 졸업하고 웅촌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6학년을 마치고 서울 경기중고등학교(당시 5년제)를 졸업하고 주변에서는 일본에 유학 하러 가기를 권유하였지만 1930년 형님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가정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어 가정을 돌보아야겠다는 생각과 당시는 일정 치하 때라 공부를 많이 한 우리나라 대다수 사람들은 일본 앞잡이가 되어 조국을 배반하는 부역자가 되어야만 출세를 할 수 있는 때라 이런 서글픈 모습이 되는 것이 싫어 유학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걱정했던 가계 운영은 형님 돌아가시고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신 형수님이 지혜롭게 잘해주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인생 공부를 더 하여 맘에 갈등을 가지고 사는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어야겠다는 일념을 가진 분이었다.

그 후 승려가 되어 불경 공부도 하고, 풍수지리학, 주역, 경조사 예절 등 사람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학문 추구에 10여 년간 매진하다 귀가하여 이웃과 울산, 동래 일대의 주민들이 살아가며 일상생활에 대하여 자문도 해주고 경조사 시 요청하면 성심을 다하여 도움을 주신 참 선비다운 모습으로 일생을 다하신 분이다. 1950년경 6·25 동란 중 정부에서 실시한 농지개혁 분배 농지 정책으로 300여 석지기 소유 농토 중 200여 석지기 농토를 몰수당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가격으로 수용당하고 100여 석지기 농사를 짓다 이마저도 농토가 줄어 머슴을 들이지 못할 정도가 되어도 고루하고 의연한 선비 모습은 변하지 않으신 분이다.

박일호 씨 댁은 웅촌면 석천으로 거주하기 전 백동에서 살 때는 100여 석지기 능가하는 여유롭게 지내는 가정이었으나 큰형님(1909년생)이 통도중학교에 재학시 학생 신분으로 사업을 하다 모든 가산을 다 날려 버려 살길이 막막하여 웅촌면 석천리에 있는 부자의 농지를 소작하기 위하여 석천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큰형님은 통도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으로 알려진 철도청 중견간부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일본인들이 강제로 자행한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여 발령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생활을 하다 해방이 되고 철도청 공작창 납품업자로 사업을 하기 위하여 부산으로 가시고 작은형님(1911년생)이 많은 소작 농사일을 혼자 감당하셨다. 이토록 힘겨운 일을 작은형님은 다 하셔도 아홉 살 아래인 동생 일호 씨에게는 성인이 되었어도 어린애 취급을 하며 농사일은 시키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서당이나 학교에 갈 사정이 못되어 박일호씨는 석천에 이주해 간 즉시부터 독학으로 짧은 시간에 천자문을 다 터득하고 계속 독학으로 공부에 매진하여 사서삼경까지 통달하였다. 운동에 취미도 있고 소질이 특출하여 십 대 중반부터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축구 경기가 있다고 하면 빠지지 않고 관람하고 선수로도 출전하였다.

특히 체구도 보통이면서 씨름에 유별난 제주가 있어 울주군민체육대회 씨름선수로 출전하여 우승한 일도 있고 전국씨름대회에 나가 수상도 하고 웅촌면민체육대회 씨름선수로 나아가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웅상으로 이주해온 이후에도 40세가 넘을 때까지 웅상면민체육대회시 우승, 준우승을 여러 번 하였다. 해방되고 나라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며 혼란통일 때 석천마을 청년 몇 사람이 좌익세력으로 몰려 웅촌지서에 연행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청년들이 웅촌지서에 가 구금된 친구들을 풀어줄 것을 항의하니 경찰들은 친구들에게 총칼로 위협하며 진압봉으로 심한 구타하는 모습에 격분하여 경찰관들에게 폭행을 가하여 묵사발의 상해를 입게 하여 좌익단체 간부라는 누명을 쓰고 경남도경으로 넘겨져 시체와 다를 바 없을 정도의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 직전에 경남도경에 간부로 근무한 집안 형의 힘으로 풀려나게 되었으나 좌익단체 협조자라는 딱지를 달게 되고 요시찰 인물이 되어 계속 감시 대상이 되고 연좌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많은 친족까지 피해를 입는 생활을 했다.

이웃에 사는 이규락씨와 박일호씨는 연세도 같고 두 가문은 얽히고설킨 불가분한 혈연관계이기도 하고 학문을 추구한 길은 하늘과 땅의 차이지만 모든 부분에 통하는 두 분은 학문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논하며 비판도 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화를 나누는 당시로서는 지역에서 최고 수준의 대화를 나눈 분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어린 시절이라 두 분의 대화를 자주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은 대화였지만 정의감 있고 절개가 확고한 학자들의 대화라는 생각만은 분명해 그분들의 긴 시간 대화를 즐겨듣길 참 좋아했다. 이승만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자행할 때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라 실제 선거 분위기를 보고 느꼈고 기억을 그대로 한다. 어린 마음에도 민주주의 국가 선거 방법이 이토록 타락할 수 있을까 하는 울화가 치밀었다. 필자는 같은 또래보다 더 많은 정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규락씨와 박일호씨가 나눈 대화를 자주 들은 덕분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자유당의 부정선거 이야기를 자주하다 교장선생님(홍성률)이 사실을 알고 교장실로 호출당해 어린 학생이 정치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다. 자유당 정권은 정부산하 모든 기관과 관련 단체에 강제로 부정선거에 앞장서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정해 시행하도록 지시하고 당시 시도지사, 사장과 군수, 읍면장, 많은 기관 단체장까지 임명할 때라 부정선거에 소극적인 기관장과 선거 결과 자유당 표가 작게 나오는 지역 기관장은 엄중 문책을 감수한다는 서약서까지 제출받았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에게 꼭 투표해야 나라가 살지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합리화시킨 논리를 모든 공직자와 마을 이장 반장까지 강제와 매수 방법으로 세뇌하여 자유당 선거운동원으로 만들었다. 모든 교직자까지 부정선거에 앞장서도록 했다. 모든 담임선생님이 해당 반의 학생들 가정방문을 집마다 하며 부정 선거운동을 하도록 하였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김천석)도 집에 아버지를 찾아와 자유당 선거운동을 하러 왔다가 하니 아버지께서 달갑게 대하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는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시며 가셨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서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반별로 반상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고 자유당에서 제공한 술과 음식을 대접받고 고무신, 양말까지 나누어주며 자유당에 투표해야 하는 얼토당토않은 당위성과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너무 확실한 사실이지만 선거운동 과정에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선거 결과 자유당 표가 작게 나오는 마을은 산림법과 밀주 단속법으로 마을 전체 주민들을 모조리 중형을 적용해 신체 구금과 엄청난 벌금을 가해 마을 전체가 몰락하는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위협도 하고 부정선거 방법도 구체적으로 교육을 하였다.

당시 국민의 학문 수준은 자기 이름자도 쓸 수 없는 유권자가 60% 이상을 능가하였으니 순진하고 어리석은 우리 국민은 정치 분별력은 너무 무지한 상태였다. 이런 무지몽매한 국민을 농락한 것은 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투표용지에 쓰인 후보자 이름자도 기호 수를 아라비아숫자로 기재하면 읽을 수 없는 국민이 너무 많아 기호 표시를 작대기 수로 표시하였다. 국민의 수준이 이런 상태였으니 나쁜 위정자들은 국민 알기를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하였다. 마을이 쑥대밭이 되지 않으려면 꼭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며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고 같이 맹세하는 다짐의 함성도 하였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방법은 실제 투표한 투표용지를 담은 투표함은 개표소로 가는 도중에 자유당에 몰표로 투표한 사전투표지를 담은 투표함과 교체하여 개표소로 이동하게 하고 선거투표에 임하는 유권자들에게는 투표소에 3인조 5인조 같이 들어가 공개투표하여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하였는지 서로 확인한 후에 투표함에 넣도록 하였으며 이것도 부족하여 투표일 하루 전에 마을 이장과 반장을 통해 집집마다 유권자 수 대로 자유당 완장을 배부하여 투표장에 가는 과정에 자유당이란 완장을 착용하고 가도록 지시하였다.

이규락씨와 박일호씨는 이런 정부를 개탄하며 이런 부정선거를 하면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도저히 사람의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라 하고 이런 부정한 방법으로 이룬 정부는 망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지식인이라 자부하고 있는 우리가 부정선거 놀이에 놀아나면 우리는 지식인이 아니길 포기하는 길이라 하며 두 분은 강제로 착용토록 한 자유당 완장도 거부하고 투표소에 여러 명이 같이 들어가도 어떠한 방법으로 투표하든 비밀투표를 하기로 약속하고 이 약속을 행동화한 지식인이다.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선거 방법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 용기를 가지지 않으면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분은 공개투표를 하지 않은 사실로 두 가정은 몰락할 것을 감수하고 용기가 있게 행한 의인의 행동이었다.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이 시대에도 검사 중에서는 법을 우선 적용하지 않고 감정으로 법을 적용하는 검사가 있는데 그 시절 법은 자유당 감정이 바로 법인 시대였다.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게 되고 두 분에게는 아무런 위해도 당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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