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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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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은 아일랜드 킬테어에서 출생한 남극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1874-1922)이 사망한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섀클턴은 평생에 4번의 남극탐험을 하는데 첫 번째는 디스커버리 호로 스콧의 탐험대에 동행하였는데 남극점에서 북쪽으로 1,000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괴혈병으로 신음하던 섀클턴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 채 썰매에 실려 오는 신세가 되었다. 님로드 호를 타고 탐험한 두 번째 항해에서는 남극점을 156km을 남겨둔 상태에서 식량 부족과 대원들의 체력 저하로 포기하였지만 전 대원이 무사 귀환하는 최고의 실적으로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기사 작위를 얻는 영광까지 누렸다. 세 번째 남극탐험 이야기를 오늘 하고자한다. 그리고 퀘스트 호를 이용한 마지막 탐험에서 관상 동맥경화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으며 지금은 사우스 조지아 섬에 묻혀있다.
1914년 12월 5일 섀클턴을 포함 28명의 대원은 범선 인듀어런스 호를 타고 최초로 남극대륙을 육로로 횡단하는 것을 목표로 사우스조지아 섬에서 출항을 하였다. 출발 이틀 만에 처음으로 부빙군을 만난 이후 6주 동안 배는 부빙군을 피해 멀리 돌기도 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밀고 나가기도 하며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내려갔다. 1914년 마지막 날에 남극권인 남위 66도 33분을 진입했고 10일 뒤 남위 72도 지점에 이르자 코우츠 랜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극횡단을 하기 위해서는 웨들해 동쪽의 바셀 만에 도착해야하는데 부빙에 갇혀 130km를 앞두고 1m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1월 24일 밤에 얼음 사이로 작은 틈이 생기면서 배가 직각으로 물길이 열렸지만 그 길이는 겨우 100m에 불과했다. 돛을 올리고 전속력으로 질주했지만 두터운 얼음을 뚫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5년 2월 24일 항해 중단을 명령하고 빙하가 녹기를 기다리며 선상에서 보내기위해 갑판 사이에 있는 창고를 선실로 개조하는 작업을 하였다.
5월 1일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앞으로 4개월 동안 계속 밤만 지속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지만 나름 온갖 종류의 오락을 개발하면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 1년 중 가장 어두운 6월이 시작되었다. 정오 무렵의 짧은 희미함과 밤중의 달빛을 제외하면 빛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다. 10월 16일 거센 바람은 얼음의 압력을 가중시켜 배가 순식간에 30도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며 10월 24일 배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최종적인 목표인 남극대륙 횡단은 불가능하게 되었기에 조직의 자원을 단기적인 생존에 집중 투입한다. 탐험 327일 째인 10월 27일 인듀어런스 호는 난파되었다.
섀클턴은 1902년 스웨덴 탐험대가 만든 오두막에 비상 물품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썰매와 구명보트를 끌고 톱니바퀴 같은 얼음 벌판을 가로질러 550km 떨어진 폴렛 섬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전 대원들이 하나의 공동 목표를 향해 진전할 수 있도록 단결시켰다. 섀클턴은 생존에 필요한 개인 소지품 1kg만 허용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탐험을 계속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금화, 시계, 은 브러시, 여행 가방, 금장 담배 케이스와 알렉산드라 황태후가 선물한 성경에서 기도문이 씌어진 여백지와 시편 23편이 들어 있는 페이지와 욥기에서도 한 페이지를 뜯어내고 버렸다.
섀클턴의 이러한 극적인 행동은 대원들에게 오직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각인시켰다. 10월 30일 부서진 배에서 100m 떨어진 넓고 안전한 부빙위에 돔형 텐트 3개, 뾰족한 텐트 3개를 설치하고 가죽 슬리핑백 18개와 울 슬리핑백 10개를 투표로 결정하여 지급했다. 나중에 슬리핑백을 배급하고 보니 일반 대원은 고급형 가죽 슬리팽백이, 간부 대원은 저급형 울 슬리핑백이 지급된 것을 알았다. 섀클턴의 리더십이 다른 대원들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여 전달된 것이다.
섀클턴은 리더에게 닥쳐오는 자기혐오, 자기파괴를 조절할 줄도 알았다. 자신이 감정 조절에 실패하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기에 신뢰하는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와 소통하며 힘든 과업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섀클턴은 인듀어런스 호 선상에서 모든 대원들이 출신과 계층을 초월하여 평등하게 생활하도록 했으며 이를 위해 대장인 자신부터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않았다. 대원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일상적인 잡무에서도 자신의 순번을 빼놓지 않고 지켰으며 일반 대원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업무를 자청했다. 주방장인 찰스 그린이 특식을 제공했을 때도 공평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며 극복했다. 태도나 행동이 팀의 사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리더십에 반발할 가능성이 있는 대원들을 파악하고 이들을 분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인정하고 대우하고 소통했다. 탁월한 팀워크만이 생존을 보장하기에 공동운명체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여 팀의 단합을 유지하였다. 섀클턴은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하기 전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대원들을 집합시키고 자발적인 토론을 유도하였으며, 대원 모두 머리카락을 자르는 의식을 통해 충성도와 팀워크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팀이라는 팀메시지를 전달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부빙이 녹기 시작하였기에 1916년 4월 9일 부빙에서 제일 가까운 엘리펀트 섬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하고 작은 보트 3대에 대원들과 남은 식량을 싣고 항해를 시작했다. 남극의 겨울 바다에서 작은 보트를 의지하여 7일 동안을 공포에 떨며 보냈다. 부빙 위에 허술한 캠프를 설치하고 적은 양의 식량으로 170일이나 표류했으며, 항해 이후 497일 만에 처음으로 육지에 상륙한 엘리펀트 섬은 안락한 피난처는 아니었다. 섀클턴은 식량이 바닥난 상황에서 엘리펀트 섬에서 1,280km 떨어진 사우스조지아 섬까지의 마지막 항해를 하기로 결정했다.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제임스 커트 호로 타고 4월 24일 6명(섀클턴, 프랭크 워슬리, 톰 크린, 맥니쉬, 맥카티, 빈센트)의 특공대가 출발했다.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와 16일간의 항해 끝에 안전한 킹 하콘 만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배를 해안 안쪽으로 끌어다 놓고 거꾸로 뒤집었다. 배의 한쪽 끝을 바위에 얹어서 드나들 수 있는 입구를 만들고 바닥에는 마른풀을 푹신하게 깔았다. 아득한 오두막으로 변한 커드 호를 대원들은 페고티 캠프라고 불렀다. 눈과 우박이 퍼붓는 나쁜 날씨 때문에 3일 동안 오두막에 갇혀 있어야 했다. 큰 배가 있는 스트롬니스 포경기지까지는 40km의 큰 산맥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친 3명의 동료는 페고티 캠프에 남겨두고 섀클턴, 톰 그린, 프랭크 워슬리가 5월 19일 출발하여 장장 36시간의 힘든 등반을 하여 5월 20일에 스트롬니스 포경기지에 도달했다.
3일 후 영국인 소유의 서던 스카이 호의 도움을 받아 엘리펀트 섬에 남겨진 22명의 대원을 구조하려 출발했지만 60km를 남겨둔 지점에서 부빙군으로 만났다. 한동안 부빙군 주변을 맴돌던 선원들은 결국 연료 부족으로 일주일 만에 항구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6월 10일 우루과이 정부가 제공한 인스티투토 드 페스카 호로 구조를 떠났지만 엘리펀트 섬 부근에서 얼음에 의해 심한 손상을 입은 채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세 번째 시도는 영국협회가 지원해 준 엠마 호로 구조를 나섰지만 기상 악화로 엘리펀트 섬을 150km 앞둔 지점에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제임스 커드호가 출발한 지 벌써 4개월이 지난 뒤 칠레 정부가 얼음이 없는 바다에서만 항해한다는 조건으로 작은 증기 예인선 엘코 호를 빌려주었다.
8월 25일 섀클턴, 크린, 워슬 리가 칠레 선원과 함께 엘리펀트 섬을 향해 출발하여 엘리펀트섬에 남겨진 22명의 대원을 무사히 구조함으로써 섀클턴의 3차 남극탐험은 끝이났다. 비록 남극대륙 횡단은 부빙으로 실패를 하였지만, 남극 빙벽에서 634일을 견디며 전 대원이 무사 귀환한 이 탐험을 역사에서는 위대한 실패 또는 위대한 항해라 부른다. 처절한 시련을 겪은 인듀어런스 호의 대원들에게 유일한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남극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이 생존드라마에서 섀클턴은 자신과 대원들과 항상 함께했다. 섀클턴 탐험대는 얼음에 둘러싸인 채 남극의 극한의 추위와 보급품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대원들이 보여준 행동은 위기에 처한 개인이나 기업에 많은 교훈을 준다. 100년 전 이들이 처했던 처절한 생존의 상황은 코로나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오늘의 비즈니스 세계와 너무 닮아있다. 한국 호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와 경영인들이 섀클턴과 같은 위대한 리더십으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해주길 바란다.
물론 국민들도 스스로의 독한 마음가짐으로 힘든 시기를 극복해 나갈 마음의 자세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