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농협의 변천사를 직접 보고 체험해왔다. 10대 후반에 이동농협 상무로 재임하면서 전국 현물출자 1위를 달성하여 부산 서면 옛 태화백화점이 자리했던 일대에 토지를 매입하여 농산물판매장과 대형마트와 부산에 유학하는 조합원 자녀들의 무료합숙소 건립을 한참 추진하고 있을시 정부의 읍면 단위 1개 농협 합병추진으로 인하여 이는 무산이 되고 웅상 9개 이동농협 중 8개 농협은 1969년 웅상단위농협에 합병하고 명곡이동농협만 합병에 응하지 않고 있다 갖은 압력과 법개정으로 이동조합을 유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1973년 명곡농협도 자산 중 일부를 웅상농협에 출자하고 대다수 재산은 처분하여 배분하고 일부는 마을공동재산화 했다. 만약 그때 단위농협 합병에 응하지 않고 명곡이동농협을 존속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면 명곡이동농협의 규모는 현 웅상농협 몇배 규모는 되었을 것이다.
당시 가계약을 하고 일부 계약금까지 지불한 토지만 매수하여 소유하고 있었다 해도 명곡이동농협 조합원 1인의 배분액은 150억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1979년 20대 후반의 나이에 웅상농협 감사로 선출되어 당시 감사 임기는 2년이었다. 감사를 연속 3선을 하였다. 초선 감사시절 농협춘천연수원 농협 임원연수 3주 코스를 자원하여 수료하고 수료식때 수료생중 학업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감사 재임기간 중 감사 사임을 하고 삼십중반의 나이에 웅상농협 조합장 선거에 출마하여 압승으로 당선되었다. 1985년 5월 27일 전국 최연소 조합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웅상농협이 소재한 위치는 서창5일시장 안에 대지 70여평이 되는 곳에 있었다. 취임 당일 취임선서와 조합장 사직서를 작성하여 조합장 전용금고에 보관하고 조합장 업무에 임했다. 사직서를 작성한 사유는 농협의 제도와 슬로건은 중앙회는 회원조합을 우선으로 한다고 하면서 실제는 회원 조합이 존재함은 중앙회와 직원을 위한 행위가 절대 우위였고 회원 조합 역시 조합원을 위한 농협이 아닌 임직원을 위한 조합이였다.
모순된 제도와 시행상의 문제에 항거하고저 운동가적인 맘으로 농협조합장에 출마하였기에 항거하다 사법처리도 불사하고 자리를 떠나야 할 일이 발생한다면 언제 어느때고 사직할 각오로 임했기에 사직서도 보관 관리해 오다 조합장 임기 3선을 끝내고 퇴임하는 날 집으로 가지고 가 소각했다. 세월이 엄청 지난 지금도 농협 조합장 선출에 관한 선거법은 뜻있고 능력 있는 후보자를 선출하기 위한 법이 아닌 기존 조합장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 표현하는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필자가 조합장 선출시 법은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대의원 과반수 이상 득표를 얻은 사람을 선출하여 농협중앙회장의 승인을 득하여 조합장에 임명될 수 있었다. 중앙회장은 농수산부장관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한마디로 농협은 정부의 하수인 역할을 하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조합장 출마시부터 가진 복안이었던 중앙회장 선출과 조합장 선출을 직선제로 입법개정하고 농지세 전액 감면과 수세 전액 감면을 위한 연판장을 전국 조합장들이 서명하여 정관계에 제출하고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설정 하도록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개별과 집단 행동을 하여 김대중대통령 출마 공약 사업으로 설정하는데 최선봉에 나섰다. 김대중대통령은 당선하고 취임 즉시 제일먼저 시행한 농업정책은 농협중앙회장 직선제와 조합장 직선제를 시행되도록 하고 농지세와 수세를 전액 감면 하였다. 농지세 수세 감면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정부가 농민에게 준 수혜중 가장 큰 수혜였다. 당시 조합장에 선출된 모든 조합장은 조합장을 사직하고 1987년 2월에 전국조합장 직선 동시 선거를 실시하였다. 필자 역시 조합장에 취임한지 1년반이 지난 때 조합장 직을 사직하고 직선 선거에 임했다. 요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분별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2선 3선을 단일 후보로 무투표 당선이 되었다.
조합장 선출방법을 간선제로 하는 모순 중 가장 큰 문제점은 타락된 돈 선거가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악순환은 직선제로 전환되면 개선될 것이라는 생각에 직접선거 입법화에 앞장서게 된 원인인데 당시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당시 농협조합장 선거에 사용한 금액이 작게는 농지 2000평 값인 이천만원을 사용하고 많게는 농지 만평값을 능가하는 금액을 사용하였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들렸다. 필자도 초선 조합장 출마시 최소금액인 2천평의 농지를 팔아 조합장 선거에 사용하였다. 2선인 직선제에 출마하기 위하여 농지 천평을 매도하여 선거준비를 했는데 단일후보로 선거없이 당선되었다. 회야댐이 완공되고 회야댐 상류인 웅촌 전역과 웅상 일부지역이 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되고 곧이어 전역을 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 확정하고 전역을 수원보호구역지정계획 확정 고시를 하고 이를 추진중이였다. 웅촌과 웅상에는 작은 농가 창고 작은 농막도 건립허가신청을 받지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이를 방관하면 안된다는 긴박감을 가지고 해지 투쟁을 위한 불씨와 불소시개 역할을 하기 위하여 조합장 선거 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준비한 일천만원 중 오백평값인 500만원을 투쟁을 위한 자금으로 기탁하여 곧이어 대통령선거인 차정웅의원이 500만원 기탁하고 골프장에서 500만원 기탁과 많은 주민들이 많고 적은 금액을 기탁해와 기탁한 전체 금액이 5천만원이 되었다.
투쟁위원장에 전대의원 박봉수를 추대하여 과천청사에 많은 버스를 전세내어 주민들을 모시고 가 여러차례 시위도 하고 지역에서도 수차 시위를 하고 정관계 힘이 닿는 곳이라면 문턱이 달토록 방문하고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수원보호구역지정 확정계획 지역이 해지되었다는 통보를 1991년 받았다. 만약 그때 수원보호구역 해지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웅상 웅촌 전역은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전형적인 농촌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울산시민 인구는 90만명이였고 웅상인구는 2만 정도였다. 울산시에는 국회의원이 5명이였고 양산에는 국회의원이 김동주 한명이었다. 김동주의원의 힘이 큰 힘이 되었다. 건교부, 환경부, 관계 말단 직원부터 장관까지 개별면담을 하고 식사와 술자리도 수차 하는 공을 들였다. 군수 도지사 지방공무원들은 불가능한 일을 한다고 정신병자 취급을 했고 주민 상당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빈정거리는 주민들도 많았다.
당시 모금한 5천만원을 토지가로 환산하면 지금 시가로 최소 100억원을 능가하는 금액이다. 조합장 선거 자금으로 준비한 1천만원 중 500만원은 투쟁자금으로 기탁하고 500만원은 약 500평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이 토지가 10여년전 도로확장으로 일부 편입되었다. 보상금액이 평당 200만원을 받았다. 이런 토지가 상승요인도 해지투쟁의 효과임이 틀림없다. 수원보호구역 해지는 웅상주민들을 부자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이며 웅상농협 발전도 이와 동반하였다.
당시 어업용 면세류만 공급하고 있었다. 농업용 면세류 공급 할 수 있도록 입법개정하여 줄 것을 이재우국회의원과 김동주국회의원에게 건의하여 이분들이 앞장서 농업용 면세류 공급이 가능하도록 입법화하여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1990년경 웅상의 향후 행정구역 개편을 위한 전초작업으로 100여년전까지 같은 면이였던 웅상과 웅촌 통합을 위하여 웅상농협과 웅촌농협 합병 추진할 계획을 하고 중앙회장 한호선과 농협중앙회 회원농협 지원부장 웅촌 출신 이재관을 상면하여 두 개 농협이 합병결의가 되면 중앙회의 모든 역량발휘를 다하여 지원해 줄 것을 약속 받고 웅촌농협 관계자와 수차 만나 설득하였지만 오로지 조합장 자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으로 농협 미래나 지역 미래에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라 합병추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미래를 위하여 웅상, 웅촌, 온양, 삼남 농협까지 합병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농림고시를 패스해 농수산부에 근무한 웅상 편들 출신 신현관을 통해 웅촌 출신이며 농수산부차관 김태수 힘을 빌리고 경상남도 농정국장 안두환의 협조와 정치권의 협력으로 농산물판매장 유치 정부지원대상 여건을 조성하여 4개 농협 중간지점인 용당일대에 농산물판매장을 건립하고 합병농협 본소 부지와 대형마트 부지, 주유소 부지까지 매입할 계획을 하고 추진하여 향후 4개 조합 권역을 지방기초단체 권역으로 추진하였는데 후일 무산되었다.
시중은행이 웅상에 점포를 개설할 채비를 하고 있을 쯤 중앙회장실을 방문하여 농협중앙회 웅상지점 개설을 건의하니 단술 먹고 취한 사람이 아닌양 하는 표정이었다. 농협 창립 이후로 회원 조합장이 사업지역내 중앙회 지점 개설 요청한 사례는 최초라 하며 단위농협 사업지역에 중앙회 지점 개설을 계획하면 조합장마다 사생결단으로 대응하는게 공통된 모습인데 이런 이상한 조합장이 있느냐 했다.
웅상에는 시중은행 지점이 줄지어 개설할 것을 너무 자명한 사실인데 시중은행 점포 개설 이전에 중앙회 지점이 개설되면 상호 보완 기능으로 협력하면 지역민들의 권익 지키는 힘이 될 것이다 하여 중앙회 웅상지점이 개설되게 되었다. 부산대학교 농협중앙회지점 개설에도 일조를 했고 양산군청중앙회 출장소 개설시에도 농협중앙회 양산시지부장 최문갑과 협력하여 전국에서 최고 많은 중앙회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여건조성에도 한몫을 했다.
조합장이 해야할 일은 해당 조합 경영을 잘 하는 일도 소홀하면 안되지만 더 우선된 일은 모순된 제도 개선에 앞장서야 하고 사회적 책임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지역발전을 위하는 일이 농협육성의 적극적인 선택이란 사실을 체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