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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동식 칼럼

르네상스를 이끈 코시모 데 메디치로부터 배우는 겸손의 미덕

웅상뉴스 기자 입력 2023.01.14 11:31 수정 2023.01.14 11:31

변화혁신 아카데미 하동식 원장

ⓒ 웅상뉴스(웅상신문)
천 년의 중세를 마감하고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창조한 메디치 가문이 활동했던 15-16세기는 역사와 예술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 당시 피렌체의 모직물 산업은 지중해 무역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무젤로 지방에서 피렌체로 이주해 온 이민자 신분이었으며 가문의 선조들은 1200년대 중반부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메디치의 가문의 설립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부인이 가져온 결혼 지참금으로 사촌이 운영하는 로마의 은행에 투자하면서 은행의 동업자가 되었다. 조반니는 1397년에 다른 두 명의 투자자와 공동으로 피렌체에 은행 본점을 설립했으며, 환전 업무만으로는 은행의 확장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교황청의 금고를 관리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교황청과의 연줄이 없었던 조반니에게 교황을 꿈꾸었던 발다사레 코사라는 사람이 추기경의 자리를 매입할 요량으로 메디치 은행을 찾아와 대출을 부탁했다.

조반니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으로 1410년에 코사 추기경이 요한 23세 교황으로 선출되는 일이 발생했다. 메디치 은행은 피사에 들어오는 헌금을 관리하는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은행 지점을 계속 개설하였다. 교황이 3명이나 되는 교회대분열 시대를 보다 못한 신성 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제안으로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요한 23세는 사기, 절도, 성직매매 등 54건의 소추를 받아 폐위되면서 하이텔베르크 성에 수감되었다. 조반니는 요한 23세를 보석금을 주고 석방시켜 피렌체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번 맺은 인연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이런 행동은 후대 교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신용과 믿음을 중시하던 메디치 은행이 성공을 거두는 요인이 되었다.

조반니가 사망하자 장남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가 1428년에 가업을 승계했다. 마르티누스 5세 교황으로부터 교황청 자금을 관리하는 주거래 은행이 되면서 해외에 피렌체 은행 지점을 설립하는 세계 최고의 부자 가문으로 등극한다. 피렌체에서 코시모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1433년 시뇨리아를 장악한 알비치 가문은 코시모를 베키오에 감금했다. 코시모는 친한 인맥을 동원하여 사형에서 추방으로 선고를 축소하고 결국 베네치아로 추방된다. 그러나 코시모가 떠난 이후 피렌체의 재정이 크게 흔들리자 그의 추방령을 철회하라는 여론이 높아졌으며 1년 만에 피렌체로 되돌아온다. 그는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되면서 공화정의 형태를 띠었지만, 메디치 가문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전제정치를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기에 그는 언제나 자중하고 겸손하게 처신한다. 메디치 저택을 건축하는데 그 당시 최고의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가 설계도를 가져왔지만 너무 웅장한 설계도면이라 거절을 하고 미켈로초의 검소한 설계도면을 승인하고 메디치 저택을 건축한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코시모의 기도하는 방에는 자신의 왕관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어린 예수에게 기도드리는 코시모의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 메디치 저택의 가족 예배당 벽면에 베네초 고촐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행렬에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당나귀를 타고 가는 코시모의 모습을 볼 수 가 있다. 시내 거리를 걸어 다닐 때에도 수수한 복장으로 시종 한 명만 대동하며 노인들에게 길을 양보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며, 행정 장관에게도 극도의 예우를 갖추며, 부유 가문의 자제들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한다. 시민들을 만나면 항상 먼저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고 행복한지를 묻고 도움이 필요하면 항상 찾아오라고 하니 시민들이 존경할 수 밖에 없다.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위협을 받는 콘스탄티노플 지원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페라라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동로마 황제 요한 팔레올로구스와 총대주교 요셉을 비롯하여 다수의 주교와 신학자들이 참석하여 협상을 하였지만 정치적 문제로 의논이 지지부진하자 사려 깊은 코시모는 공의회의 장소를 교황 유게니우스 4세를 설득하여 피렌체로 장소를 변경하고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였다. 정치적 영향력을 유럽 대륙에 과시한 결과 대외 교역량은 증가되었고,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도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 전체로 전파됨으로서 르네상스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코시모는 미켈로초에게 메디치 궁전과  산 마르코 성당과 도서관 외에도 메디치 가문을 위해 많은 건축물의 설계를 브루넬레스키에게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돔 건설과 산 로렌조 성당같은 건축물 작업을 후원했고, 도나텔로에게 청동 다비드를, 보티첼리에게 <동방박사의 경배>를 맡겼다. 프라 안젤리코, 미켈란젤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활동을 했다. 특히 회화는 메디치의 전략적 마케팅으로, 신과 메디치 가족의 신성한 관계를 암시함으로써 가문의 위대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시모는 자신의 부를 피렌체 시민들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고아원과 양로원과 병원과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했다

그리하여 피렌체는 유럽의 다른 도시에 비해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으며,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신학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권력 기반을 다진 코시모는 비잔틴 제국에서 온 그리스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을 초청하여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차이를 강의하도록 지원했으며, 마르실리오 피치노로 하여금 카레지 별장에 철학과 고전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운영을 맡겼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코시모의 전적인 후원으로 유지되었으며 플라톤 철학이 고대 사유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사상을 주변에 설파하여 인문주의 안에서도 고대의 재탄생을 촉진시켰고 이탈리아 전역에 고대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인문학을 비롯하여 수학, 의학, 공학, 건축 분야에서 혁신을 유도했다.

코시모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과 도서관 애호가였는데, 이런 성향이 그로 하여금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코시모는 학자들을 유럽과 비잔틴 제국에 보내어 인문학과 철학 등의 고문서를 수집하도록 했으며, 고문서 수집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고문서의 매각을 거부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45명의 필사 전문가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수집한 고문서들을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자료와 르네상스를 여는 기초가 되었으며,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메디치 도서관 관장인 토마소 파렌투첼리(후에 니콜라오 5세 교황)는 훗날 인문주의자 교황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으며, 그가 설립한  바티칸 도서관도 메디치 도서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코시모는 1464년 미켈로초가 설계한 카레지 별장에서 임종하여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인 산 로렌초 중앙 제단 아래에 묻혔다. 그의 영묘를 제작한 사람은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던 피렌체 출신의 조각가로 전통 고딕조각을 극복하고 자연 관찰의 결과로 제작된 르네상스의 조각 세계를 개척한 도나텔로였다. 코시모가 남긴 명성은 국가의 명예가 되었으며  그가 사망하였을때 산로렌초 교회로 가는 운구행렬에는 구름같은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시뇨리아는 코시모의 생애를 추도하며 국가의 아버지라는 명칭을 수여했고, 시민들은 이 명칭을 코시모의 무덤에 새기는 것에 찬성함으로서 영원한 존경심을 표했다.  코시모는 350여 년을 지속한 메디치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로마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등장하게 된 것과 전 유럽에 메디치 지점을 개설하여 가문의 부를 축척하게 된 기반은 모두 코시모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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