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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즉위 16년(1593년)에 새로이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겸임케 하였다. 통제사의 본영을 ‘삼도수군통제영’ 또는 줄여서 ‘통제영’ 또는 ‘통영’이라고 불렀다. 한산대첩의 위대한 승리는 ‘통영’이라는 이름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제61회 통영한산대첩축제’가 8월 6일부터 9일간 통영시 일원에서 개최된다. 통영시는 올해 한산대첩축제의 주제를 '장군의 눈물'로 정했다.
한산대첩 시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은 55척 중 단 한 척의 전함도 잃지 않았다. 전선 73척의 ‘와끼자카’의 일본 수군은 침몰 47척, 나포 12척으로 겨우 14척만이 도주하였다. 이도 추후 상당수는 파손되었을 것이며 일본 수군의 병력도 5천 명 이상 전사하였다.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와 휘하의 병력 200여 명은 무인도에서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떠돌다 겨우 탈출하였다. 이때 ‘마나베 사마노조’는 자신의 전함이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세 가지 현상에 날이 갈수록 놀라고 결국 그로 말미암아 패퇴하였다.
첫째 선조의 파천. 왕이 궁성을 버리고 국경 끝으로 도망 칠 줄은 일본군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일본은 패한 영주는 포로가 되거나 자결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순신 장군의 존재. 32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급제하고도 하위직으로 변방을 떠돌던 장군은 왜군의 치밀한 정탐 망에도 포착되지 않았다. 조선군 포로들도 ‘신립’과 ‘이일’ 장군은 알았지만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였다.
셋째 조선 의병의 활약. 일본 백성은 일종의 농노로써 영주의 재산으로 치부되었다. 영주가 바뀌어도 승계되므로 주인의 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민초들은 가렴주구와 학정에 시달려도 나라와 향리를 지키는 것은 자기들의 당연한 의리요 본분이라고 믿는다. 당연히 지팡이와 농기구를 들고서라도 떨쳐 일어났다. 지금도 위기에 떨쳐 일어나는 전통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358년이 지나 통영은 육지에서도 다시 한번 역사적인 승전보를 올린다. 6.25 동란이 일어나자 통영은 남과 북에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이미 통영 일대가 북한군 7사단에 점령되어 마산과 부산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에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국군해병대가 통영시 장평리 앞바다로 상륙하여 악전고투 끝에 승리하였다. 패퇴한 북한군은 원문고개의 아군에게 3시간 동안 580여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그 후로 온갖 공격에도 국군해병대는 굴하지 않았고 통영은 안전하게 수복되었다. 미국의 여성종군기자 ‘마가렛 히킨스’가 원문고개를 점령한 해병대의 ‘김정은 부대’를 취재하고 "귀신이라도 잡겠다."(The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는 감동을 세계로 타전하였다. ‘귀신 잡는 해병대’는 이렇게 통영에서 탄생되었다.
통영에서 서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차를 몰면 진주시가 나타난다. 임진 년, 전국적인 의병 활동과 이순신에 의해 왜군의 흉흉한 기세가 꺾인다. 해군은 포기한 채 육군을 대규모 동원하여 전라도 진입의 요처인 진주성을 점령하려고 한다. 7월 하순 서진하여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대군을 몰아 10월 초에 진주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의 탁월한 지휘와 ‘홍의 장군 곽재우’의 분전으로 대패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 장군에 의한 바다의 패배보다 진주목사 김시민에 의한 육지의 패배를 더욱 분하게 생각하였다. 다음 해, ‘모쿠사(목사)’의 목을 노리고 다시 9만 3천 명의 대군을 몰아 공격하니 결국 진주성은 함락된다. 이때 6천 명의 조선군과 2만4천 명의 백성들이 그 자리에서 전멸한다.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한 송이 꽃이 되어 푸른 남강에 몸을 던진다.
진주의 ‘촉성루’는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3대 누각에 속한다. 진주 또한 예향이요 맛 고을로 이름이 높아 군사들의 전투식량이었다는 ‘꽃밥’이라는 ‘육회비빔밥’은 사랑받고 있다. 담백하고 깊은 맛의 ‘진주냉면’ 또한 일품이다. 통영과 진주는 한산대첩과 진주대첩으로 지척에서 각각 나라를 구해냈다. 널리 추앙받아 마땅한 성스러운 땅이다.